임명섭 주필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생가터를 다녀간 사람은 모두가 호국 충절의 위인을 이렇게 버림받게 하고 있다는데 공감하며 발길을 옮겼다. 장군의 생가 빈터에는 유적지란 성역화를 어느 한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표시판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이곳에서 태어나 15살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생가지에는 지금까지 충절의 얼이 담겼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모습은 전연 찾아볼 수 없었다. 사사처도 없고 충열사도 건립되지 안 했다.

생가지를 찾는 관람객들이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간편한 의자 등 휴게시설마저 없어 물 한 모금 조차 마시지 못하고 생가터 잔디만 바라보고 돌아설 분위기다. 최근에는 천안시가 생가터로 들어오는 진입도로 일부를 매입, 포장했을 뿐 단 한대의 승용차조차 세울 수 있는 주차시설도 전무한 상태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을 염두에 두고 찾았던 관람객들은 실망과 함께 당국의 충절에 대한 위인을 저버리는 행정을 원망하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충무공 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회장.김법혜스님)는 호국충절의 고장을 지키기 위해 해마다 9월이 면 민족정기의 틀을 후손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올해도 각종 문화행사를 열어 민족정기를 선양 계승하는데 앞장서 장군의 업적을 알리는 행사로 명맥을 이끌어 가고 있다. 바로 옆 아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는 국가 차원의 성역화가 된지 오래된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같은 충무공인데도 김시민 장군의 생가지는 성역화는 고사하고 유적지로서의 대우를 오랫동안 받지 못하고 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때 벌어진 진주 대첩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 낸 조선의 장군이다.

3천800여 명의 군사와 백성으로 2만여 명의 일본군을 물리친 장군이다. 전투 후 숨어 있던 적군의 총탄에 맞아 3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친 비운의 장군이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1554년(명종 9)년 충청도 목천현(木川, 현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서 출생했고 아버지는 지평(持平)을 지낸 김충갑씨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어려서부터 무사적 기질이 강했고 활도 잘 쏘았다. 천안이 낳은 충절의 영웅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올해로 탄신 466주년을 맞는다. 올해도 숭고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삶을 기렸던 기념사업회가 주최가 되어 탄신기념행사를 코로나로 인해 축소돼 간소화하게 치렀다.

올해 문화재에서는 호국충절 선양 봉사상과 전국통일문예공모 시상식 등 장군의 애국충절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널리 되새기게 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사업회는  4년째  계속된 전국 통일문예 작품전에  올해는 전국에서 일반부 150편, 학생부 230편의 많은 작품이 응모해 왔다.

엄격한 심사 결과 41편이 입상, 통일부 장관상을 비롯 교육부 장관상, 충청남도지사상, 충남교육감상, 천안시장상 등 푸짐한  시장자가 나왔다. 올해는 수준 높은 작품이란 심사평을 받아 냈다. 천안 생가지는 사사처와 유허지이다.

이곳 백전마을 노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장군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생가터다. 장군이  9살의 어린 나이에 활을 쏘아 이무기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장소이며, 충무공의 상무정신과 용맹함을 알리는 기념 비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다.

주요 시설물로 구암 1기, 유적비 1기 등이 있다. 구암은 충무공 부친인 구암 김충갑의 호가 유래된 바위로서, 「김씨세거(金氏世居) 백전동천(栢田洞天)」이라는 명문이 바위 후면에 각자 되어 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생가지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 역사의 교육장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곳 이다.

정부는 장군의 생가지를 국가사적지로 하루속히 지정하고 충렬사 복원 및 기념관 건립 등 성역화를 조성 후대에 충렬의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도록 주선해야 한다. 지금은 기념사업회가 나서 찬란한 그의 역사적 업적을 해마다 기원하고 있으나 국가지정사적지로 승격되면 성역화는 물론 국가 차원의 관리로 애국충절의 정신을 후손에게 되새기게 하는 뒷받침이 조속히 이룩했으면 한다.

지금은 생가터를 찾는 순간 안타깝고 부끄러움으로 가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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