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작독음(獨酌獨飮). 백수를 자청한 연암 박지원은 혼자 노는 삶을 즐겼다. 요즘 말로 ‘혼술 혼밥’도 잦았다. 젊어서는 우울증으로도 고생했다. 폐인처럼 지낸 날도 부지기수. 친한 친구의 억울한 죽음을 겪으면서 과거 급제를 통한 출세의 의지를 완전히 내던지게 된다. 줄곧 동경하던 열하로 가는 여정에서도 그랬다. “좋은 울음 터다. 한바탕 울만하구나.”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첫발을 내디딘 연암이 요동 벌판을 보며 내지른 일성이다. 물론 흔히 말하는 울음과는 거리가 멀다. 연암은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보고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벅찬 감정을 토로했다. 답답한 조선을 벗어나 마음속 응어리를 씻어내는 울음인가. <열하일기> 중 유명한 ‘호곡장론(好哭場論)’이 나온 배경이다.

연행길에서 연암은 수시로 절대 고독을 읊는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넘으면서는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마음을 삼으니, 비로소 내 귓속에 물소리가 사라졌다”고 비유한다.

27만 칸을 헤아리는 시끌벅적한 북경 번화가 유리창 어느 다락. 연암은 그곳에서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알아주는 벗을 얻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북경에서 열하로 가는 고북구의 밤. 만리장성 아래에 선 연암은 붓과 먹을 꺼낸다. 물이 없어 술로 대신 먹을 간다. 성벽에 쓴다. ‘1780년 8월 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다.’

때마침 초승달이 산마루 턱에 걸려 넘어가려던 순간. ‘그 빛이 싸늘하기는 숫돌에 갓 갈아 낸 칼날처럼’ 벼려졌다. 그러고는 한바탕 웃고 독백한다. “나는 서생의 몸으로 머리가 허옇게 세어서야 한번 장성을 나가 보는구나!”

마침내 열하에 도착하던 8월 9일 밤, 연암은 홀로 태학의 뜨락에 서서 ‘찢어지듯 밝은 달’을 쳐다본다. 때마침 달빛은 한마당에 가득 찼다. 달이 이토록 좋은 밤에 아니 마시고 무엇하랴. 정사의 베갯머리에 있던 술병 하나를 부어 마신다.

담배를 한 대 붙여 물고 나온 연암은 마당 한복판을 거닌다. ‘우르르 뛰어 달려 보기도 하고, 점잖게 뽐내어 걸어 보기도 하며’ 달그림자를 동무 삼아 한참 놀았다. 때는 밤 12시. “애달프다! 좋은 이 밤 밝은 달 아래, 같이 놀아줄 님이 이토록 없다니...”

연암도 찾았던 북경의 인사동 ‘유리창(琉璃廠)’거리

조선 시대의 폐인인가 한량인가?

정조 즉위 초, 연암은 실세였던 홍국영의 반대파에 속해 있었다. 생활이 어려워지고 생명까지 위협을 당하자 황해도 금천 연암협으로 내려가 초가를 짓고 살았다. 그곳은 모기와 파리가 들끓고, 개구리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댔다. 한 여름에는 이를 피해 서울 집으로 와 있곤 했다.

이때 연암의 부인과 자식들은 경기 광주 처갓집에 있던 참이다. 단지 어린 여종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병이 생겨 미친 듯 소리를 지르더니, 집을 나가버렸다. 이젠 밥 지어 줄 사람도 없어, 홀로 사는 집 아궁이는 거미줄이 걷힐 날이 없었다.

연암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거의 세상과 인연을 끊은 폐인 생활에 가까웠다.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고, 마음속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해박한 경륜을 어디에도 펼 곳 없었다. 때때로 편지를 받으면, 단지 ‘평안하다’는 글자만 살펴볼 뿐이었다.

갈수록 ‘멍 때리는’ 시간이 늘었다. 이제는 다른 집 기쁘고, 슬픈 일(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었다. 어떤 때는 며칠씩 세수도 안 하고, 또 어떤 때는 열흘이나 망건을 쓰지 않았다. 나이 40도 안되어 몇 해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친족 박남수에게 보낸 편지글에서는 무료한 나머지 자신의 두 손을 편갈라 6면체 주사위 ‘쌍륙놀이’를 하는 모습을 전하기도 한다.

연암이 게으름뱅이로 지냈던 것은 몸을 피해 숨죽여 살던 그때뿐이었다. 평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연암의 아들이 쓴 <과정록>에 따르면, 평소 잠이 적어서 자정을 넘어 잠이 들고 동트기 전에 일어났다고 한다. 일어나면 반드시 창문이랑 방문을 활짝 열었는데, 눈 내리는 날이나 얼음이 언 추운 아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충청도 면천(지금의 당진) 군수로 있을 때는 자식들에게 노동의 중요성을 가르치기도 했다. 직접 벽돌을 나르고 햇볕에 말려서 쌓아두라고 시켰다.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므로 건강에 좋다는 것이었다.

겸재 정선의 ‘파교설후’/ 국립중앙박물관

새벽길을 가다.- 연암 박지원/

외로운 까치 한 마리 수숫단에 잠들어 있고,

달 밝고 이슬 흰 데 논에서 물소리 들리네.

나무 아래 소담한 초가집 둥실한 바위 같고,

초가지붕 위 박꽃은 별빛처럼 반짝인다.

연암의 하루 그리고 까치와 농담 따먹기!

<수소완정 하야방우기/酬素玩亭 夏夜訪友記-‘여름밤에 벗을 찾아가다’에 답하는 글>은 연암이 제자 이서구에게 보낸 답글이다. 그의 백수 시절 생활상이 살갑게 다가온다. 따뜻한 인간미와 진솔한 감정을 그려낸 글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긴긴 날을 무료하게 여긴 백수 선생 연암. 혼자 노는 법을 터득한다. 그 방법은 이러하다.

어쩌다 땔나무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다가 이야기를 나눴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 우애, 나라에 대한 충성과 벗에 대한 신의, 사람에 대한 예의와 염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말이 길어졌다.

연암은 사람들이 싫증을 내거나 지겨워해도 그치지 않았다. 또 집에 있어도 손님 같고, 부인이 있어도 중처럼 산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졌다. ‘마침내 단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흡족해했다. 어떤 CF의 한 대목처럼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에 만족해 한 것이다.

연암은 자다가 깨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잠을 잤다. 아무도 깨우는 이가 없다 보니, 어떤 때는 하루 진종일 실컷 자기도 했다. 더러는 글도 쓰고, 혹은 새로 배운 철금(鐵琴)을 몇 가락 타기도 했다. 혹 벗들이 술을 보내주면 언제나 기분 좋게 취했다.

어느 날, 까치 새끼 한 마리가 다리가 부러져 마당에서 절뚝거리며 다녔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밥알 몇 개를 던져주었다. 까치는 길이 들어 날마다 찾아오면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까치에게 장난삼아 ‘맹상군은 하나도 없고, 오직 평원군 식객뿐이로구나’라고 농담을 던졌다.

맹상군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부유한 귀족.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아 말장난한 것이다. 평원군은 조나라 귀족으로 평소 식객이 많이 모였다. 그중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다. 애첩이 비웃는 것을 보고 평원군에게 ‘첩의 목을 베라’고 권했다. 그가 별일 아닌 일로 넘기자, 식객 가운데 반이 빠져 나갔다. 그제서야 평원군은 첩의 목을 베었고, 다시 식객이 돌아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신윤복의 쌍륙놀이. 연암이 혼자 놀았다. 간송미술관

연암의 자화자찬 ‘귀차니즘’ 예찬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남을 두루 사랑하기는 ‘묵적(墨翟)’과 같구나.

곳간을 자주 비게 하는 것은 ‘안연(顔淵)’를 닮고,

하는 일 없이 지내기는 ‘노자(老子)’와 한 가질세.

활달하게 사는 것은 ‘장자(莊子)’를 닮고,

참선을 하는 것은 ‘석가(釋迦)’인 듯하다.

공손하지 않기로는 ‘유하혜(柳下惠)’와 진배없고,

술 좋아하기로는 ‘유령(劉伶)’과 흡사하다.

남에게 밥을 얻어먹기는 ‘한신(韓信)’과 비슷하고

잠을 잘 자기로는 ‘진단(陳搏)’과 같다.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戶)’를 방불케하고

책을 저술함은 ‘양웅(揚雄)’과 한 가지라.

스스로 남과 견주기는 ‘제갈량(諸葛亮)’과 같으니

내가 거의 성인이로구나!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크지 못하고,

청렴한 것도 ‘오릉중자(於陵仲子)’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이렇게 쓰고는 혼자서 껄껄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때 나는 정말로 사흘이나 밥을 먹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웃 행랑아범이 남 집 지붕을 이어주고 품삯을 받아, 비로소 날이 어둑해져서야 밥을 지었다. 그런데 어린 녀석이 울면서 밥투정을 부렸다.

화가 난 행랑아범은 밥그릇을 엎어 개에게 던져주며 ‘나가 뒈지라’고 막말을 해댔다. 이때 나는 막 식사를 마치고 식곤증이 생겨 누워있었다. 북송 때 사람 장괴애(張乖崖)가 촉 지방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목 벤 일을 들어 알아듣게 일깨워줬다. 또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나무라기만 하면 자라서 부자간의 은혜와 덕을 상하게 하는 법’이라고 타일러 줬다.

연암은 ‘귀차니즘’ 원조?

편지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연암이 닮고 싶은 인물들이다. 양주는 중국 전국 시대 초기의 사상가이다. 개인주의 사상인 자애설을 설파했다. 묵자(묵적·墨翟)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박애와 평화주의를 제창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공자의 70여 명 제자 중에서 가장 아꼈던 안연은 도를 즐거워하고 가난은 편안하다고 여겼다.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가난에 찌들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유하혜는 노나라 대부. 춘추전국시대 전설적인 도둑 ‘도척’이 그의 동생이었다. 맹자가 자신의 처신을 백이의 처신과 비교하여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않으니, 편협한 것과 공손하지 않은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아니한다”고 했다.

유영은 진나라 때 죽림칠현 중의 한 사람.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병을 지니고 다녔다.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찬양했다. 한신은 한나라 고조의 명신. 포의 백수 시절에 생계를 꾸려가지 못해 항상 남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

진단은 송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100여 일 동안이나 깨지 않았다고 한다.

자상호는 <장자> 대종사에 나오는 인물. 자상의 벗 자여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양웅(BC.53~AD.18)은 전한 때 학자.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었으며 사부를 잘 지었다. 가난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공명은 삼국시대 촉의 재상 제갈량. 조교는 <맹자> ‘고자하’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척 4촌에 달했다고 한다. 오릉은 곧 오릉중자인 진중자를 가리킨다. 진중자는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초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했다.

겸재 정선 동리채국도(부분)

여름밤에 연암을 찾아간 제자 이서구

“유월 상현(7~8일경)에 연암 어른 댁을 찾았다. 때마침 희미한 구름은 하늘에 걸렸고, 숲속에 걸린 달은 푸르스름했다. 종소리가 둥둥 울렸다. 처음엔 우레처럼 큰 소리가 나더니, 나중엔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여운이 감돌았다. 어른이 집에 계실까 생각하면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먼저 그 집 들창을 살펴봤다. 마침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1770년 초반의 일 같다. 제자 이서구가 연암의 집을 찾아가던 장면을 묘사했다. ‘여름밤에 연암 어른을 찾아간 이야기’란 글의 첫 대목이다. 지금의 종로 3가 파고다 공원 뒤편에 있던 그의 집을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가는 길. ‘물방울이 흩어지듯’ 들려오는 종각(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골목에 들어섰다. 들창부터 엿보았다.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는 왈칵 끼쳐오는 반가움을 표현한 것 같다.

연암이 자화자찬 귀차니즘 예찬론을 쓰던 날 저녁, 연암이 사랑했던 제자 이서구가 뜻밖에 찾아왔다. 연암이 맨발에다가 망건도 벗어버리고, 행랑채 이웃과 창턱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다. 사흘째 굶고 있다가 모처럼 밥을 먹던 날이다. 행랑아범과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이서구가 왔던 것이다. 연암의 서울 옛집은 이서구의 집과 가깝게 마주하고 있었다. 이서구는 어렸을 때부터 연암의 집을 드나들며 배웠다.

이런 스승의 모습을 보고 돌아간 이서구가 편지를 보내 마음 아파하자, 연암은 머쓱했던 모양이다. 푸념 비슷한 답장을 늘어놓아 제자의 마음을 달랜다. 그 답장 편지가 <수소완정 하야방우기>이다. 소완정은 이서구의 호. 이서구는 ‘앵무새 덕후’였다. 나중에 연암은 이서구가 편찬한 ‘녹색 앵무새’ 책의 서문을 써줬다. 당시 연암이 홀로 지내며 마음을 나눈 유일한 벗은 우습게도 사람이 아닌 다리 부러진 새끼 까치였다.

새끼 까치만이 저를 위해 베푸는 사람의 후의를 마음으로 받을 줄 알았던 까닭이다. 연암은 결핍에 시달리면서도 미물에게조차 애정을 거두지 않았다. 51세에 부인을 잃었지만, 재혼도 하지 않았다. 연암은 홀로임을 즐기되 올곧은 마음으로 세상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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