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하늘로부터 먹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다가오더니 부채꼴로 퍼지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이윽고 주위가 밤처럼 캄캄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로 요동쳤다. 메뚜기 떼가 스쳐 간 곳은 잎사귀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했다. 아낙네들은 모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남정네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장대를 휘두르며 메뚜기 떼들을 쫓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31년 발표된 펄벅의 <대지> 중 클라이맥스인 메뚜기 떼 습격 장면이다. 이 소설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서양에서는 생소했던 중국을 배경으로, 자연과 운명에 맞서 삶을 개척해나가는 농부의 삶을 그렸다.

주인공 왕룽의 일대기는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일을 열심히 해 어느 정도 살만해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사건이 터진다. 특히 우연찮게 얻은 보물로 고향의 땅을 사놓고 안심하던 상황에서 닥쳐오던 메뚜기 떼의 공포는 <대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 작가 펄벅은 1938년 미국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메뚜기 떼는 농업이 발달했을 때부터 인류를 위기에 몰아넣은 대재앙이다. 서양에서도 메뚜기 떼를 신이 내린 재앙으로 여겼다.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온통 메뚜기로 뒤덮으리라. 메뚜기들이 우박의 피해를 입지 않고 남은 것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너희가 가꾸는 들나무들도 갉아 먹으리라.”- 성경 출애굽기 10장 5절. <출애급기>에서도 이집트를 덮친 10가지 재앙 중 하나로 묘사했다. 피로 변한 이집트의 강물, 개미와 모기떼의 습격 등을 이유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을 탈출한 기록이다.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는 메뚜기를 즐겨 먹었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꿀과 메뚜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태종의 야사 중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 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 삼켰다. 그 뒤 메뚜기 떼가 사라졌다고 한다.

야사인 만큼,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정조 임금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사도세자 능 주위 소나무를 갉아먹는 송충이를 삼켰다는 이야기다.

영화로 제작된 펄벅의 소설 <대지>속 메뚜기의 습격에 따른 재앙.

조선의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메뚜기 ‘황충(蝗蟲)’

곤충계의 최대 식신은 메뚜기다. 하루에 자기 몸무게만큼의 작물을 먹어치운다. 뫼(山)+뛰기(뚜기)로 산에서 뛰는 벌레라는 의미. 메뚜기목은 여치, 풀무치, 귀뚜라미, 방아깨비, 베짱이, 땅강아지 등을 포함한다. 역사서에서는 ‘황충’으로 적었다. 기원전 9세기 중국(주나라)에서는 메뚜기떼를 퇴치하는 공무원을 별도로 두었다고 하며, 약 2000년 동안 170회 이상 메뚜기떼가 출현했다는 기록이 중국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8번, 백제 5번, 신라 19번의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다. 백제 무령왕 때인 521년 가을에는 메뚜기 때문에 900호가 신라로 탈출했다.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곡식을 온통 갉아먹자 적어도 수천 명이 신라로 집단 ‘엑소더스’ 했다는 끔찍한 이야기다. <고려사>에도 황충에 관한 기록이 26번이나 된다.

조선시대는 더 많아졌다. 메뚜기로 인해 피해를 입었거나 논의를 한 실록 기록이 무려 200여 건에 이른다. 아마 꼼꼼한 기록 탓도 있지만, 무시로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은 메뚜기 떼의 출현을 양위의 이유로 내세웠다. 정종은 “나라를 다스린 지 3년이 됐지만 하늘이 허락하지 않고 민심이 믿지 않아 황충과 가뭄이 귀신의 재앙으로 변하고 있다”면서 태종에게 양위했다.

1432년(세종12) 메뚜기 때문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큰 고초를 겪었다. 함경도에 메뚜기가 창궐해 백성들이 모두 구휼미에 의존해 살았다. 1444년(세종26) 충청도 공주에 황충이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세종은 아예 군대를 출동시켜 잡게 했는데, 그때 잡은 황충의 양이 무려 120 가마나 됐다. 1547년(명종 2년)에는 들판의 물이 죽은 황충으로 인해 온통 붉게 변할 정도였다고 적었다. 그해 8월 실록을 보면 최악의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황충이 들에 가득했는데, 머리는 붉고 몸은 흰색이었다. 8~9일 동안 곡식은 물론 온갖 풀을 다 갉아먹어 황충이 지나간 자리는 삽시간에 황무지가 됐다. 그러다가 비바람이 내려 황충들이 모두 죽었는데,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이 풀과 겨로 배를 채우고 얼굴이 누렇게 떴다.”

영조 연간에도 메뚜기 떼가 기승을 부렸다. 영조는 메뚜기를 삼킨 당 태종의 야사를 거론했지만, 삼키지는 않았다. 1768년(영조 44) 호남에서 발생한 메뚜기 떼를 잡기를 명하면서, 불에 태우지 말고 구덩이를 파서 묻도록 당부했다. 메뚜기가 비록 미물일지라도, 임금인 자신의 부덕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2019년 7월 케냐 북서부에 출몰한 메뚜기떼.

소금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맛난 것

<민옹전>은 연암이 21세 되던 1757년(영조33) 무렵에 지은 풍자소설이다. 시정 세태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민옹의 나이는 73세. 무인 출신으로 첨사 벼슬도 했으나, 그 뒤 시골에 묻혀 생활한다. 민옹은 ‘역경(易經)’에 밝고 ‘노자’를 즐겨 읽으며, 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

민옹은 어느 날 밤 함께 자리한 사람들을 마구 골려댔다. 그들은 민옹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딴은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으나 끄떡도 않고 대답했다. “귀신을 본 적이 있소?” “밝은 곳에 있는 것은 사람이요, 깜깜한 데 있는 것은 귀신이다.”

“신선은?” “가난뱅이가 모두 신선이지. 부자들은 늘 세상에 애착을 가지지만 가난뱅이는 늘 세상에 싫증을 느끼거든. 세상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이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래 사는 사람은?” “글을 많이 읽은 사람.”

“가장 맛 좋은 것은?” “소금. 온갖 음식 맛을 내는 데에 소금 없이 되겠는가? 그러니 소금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맛난 것” “불사약은?” “밥. 나는 아침에 밥 한 사발 저녁에 밥 한 사발로 지금껏 이미 70여 년을 살았다네.”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 사심을 경계하지 않으면 장차 제 자신을 잡아먹거나 물어뜯고, 쳐 죽이거나 베어버릴 것이야.”

이처럼 민옹의 대답은 쉽고 막힘이 없었다. 자기를 자랑하기도 하고 열 사람을 놀리기도 해서 모두 웃었으나, 그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 황해도에 메뚜기 떼가 들끓어 관청에서 메뚜기 잡기를 독려하느라 야단이라고 했다. 민옹은 “그런 작은 벌레들은 근심할 거리도 못 된다”면서 자기가 보기에 “종로 네거리를 가득 메운 7척 장신의 메뚜기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비꼰다.

“머리는 검고 눈은 반짝거리고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날락할 정도인데, 웅얼웅얼 소리를 내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줄줄이 몰려다니며 곡식이란 곡식은 죄다 해치우는 것이 이것들만 한 것이 없더군. 그래서 내가 몽땅 잡으려고 했는데, 큰 바가지가 없어 아쉽게도 잡지를 못했네.” 그랬더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정말로 그런 벌레가 있는 줄 알고 크게 무서워했다.

2014년 해남에 나타난 수십억 마리 메뚜기 떼, 인류 재앙인가 ‘출몰 이유 몰라’

영화 설국열차 속 곤충 식량은 아직 ‘비호감’

황충은 곡식을 갉아먹는 해충이다. 민옹은 종로 저잣거리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양반을 황충에 비유한다. 또 그것들을 쓸어버리고 싶지만, 커다란 바가지가 없는 것이 한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자신들의 권세만 믿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이 땀 흘려 일군 곡식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메뚜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연암이 사람을 메뚜기로 비하시킨 풍자가 날카롭다.

연암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기득권층을 조롱하고 세상을 비판했다. 때로는 거지를, 때로는 호랑이를, 때로는 ‘허생’의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이미 20살 때부터 민옹의 입을 빌려 양반사회의 모순을 꼬집고, 통렬히 비판을 가한 것이다.

그렇다고 연암은 마냥 냉소적 시선에만 그치지 않았다. <우상전>을 통해 재능이 뛰어났음에도 역관 출신이기에 능력만큼 인정받지 못한 이언진을 안타까워했고, <열녀 함양박씨전>을 통해 수절을 강요받았던 과부들을 안타까워했고, <허생전>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의 허약함을 안타까워했다.

세상은 결코 남이 갔던 길을 맹목적으로 따라간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정호승 시인의 시어처럼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또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자기의 길을 개척한 사람을 세상은 알아주고 기억한다.

다산 정약용은 1797년(36세) 죽란사 시 모임에서 “메뚜기 떼가 들에 없는 좋은 시절을 맞았네”고 지었다. <목민심서> ‘재난구조’ 편에서도 “메뚜기가 하늘을 뒤덮으면, 혹 물러가기를 빌기도 하고 잡아 죽이기도 하여, 백성들의 재해를 덜어 주는 것이 어질다는 명성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농약을 살포하고 방제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최근 다시 메뚜기 떼가 출몰한다는 불길한 뉴스가 나온다.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발발하던 무렵,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에서는 거대한 메뚜기떼가 목격됐다. 이 사막 메뚜기떼들은 그 뒤 케냐, 우간다, 예맨, 오만, 파키스탄 등지에서 계속해서 발견됐다. 케냐는 지금 이 순간에도 70년만의 최악의 메뚜기떼 공습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지난 7월1일에 발표된 세계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피해 국가는 23개국에 이르며, FAO(유엔식량농업기구)는 메뚜기떼 습격을 비상사태로 다루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메뚜기는 몸의 60% 정도가 단백질로 이뤄진 고단백 생물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튀기고, 굽고, 말리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할 수 있다. 우리나라서도 과거 농촌에서는 메뚜기 튀김이나 볶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최근에는 살충제 때문에 식용으로 쓰는 것마저도 어렵게 됐다.

미국의 한 식품기업에서는 귀뚜라미를 가루로 만든 뒤, 카카오를 섞어서 제조한 단백질 바를 만들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연양갱과 비슷한 식재료가 실제 등장한 듯하다. 곤충이 미래 인류의 식량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비호감’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충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