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여러 사람들에게 자주 회자되곤 했던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에 관한 일화를 몇 개월 전 어느 미술전문지 기고에서 인용한 적이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기 몇 년 전, 정치에 입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리조나 주의 한 기숙 고등학교에서 열린 아들 마이클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졸업식이 끝난 후 레이건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여전히 할리우드의 스타로 인식되던 그는 새롭게 시작한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지지해 줄 새로운 팬을 확보하고자 열을 올렸다. 모자를 쓰고 가운을 입은 한 소년이 신이 나서 그에게 다가갔고, 레이건은 멋진 장면을 연출하려 애쓰느라 소년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녕, 나는 로널드 레이건이야. 네 이름은 뭐니?”’

헐리우드 스타 레이건이 정치인으로서의 새 이미지를 얻기 위한 행보에서 보인 웃지 못할 이 해프닝은 그저 가벼운 에피소드 정도로 웃어넘기기에는 서글픈 현실을 직관하게 하여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자신의 아들조차 몰라볼 정도로 친절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신인 정치인의 대중에 대한 집중력은 한편으로는 애달파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집중력은 팬을 확보하느냐 마느냐는 정치인으로서의 수명을 결정짓는 실존이기도 하다.

최근 국내 미술관과 미술관을 둘러싼 미술계의 풍경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보수적 의미에서 ‘미술관다운’‘미술관’, ‘좋은 미술관’의 지표는 ‘전시’외에 ‘컬렉션’, 즉 소장품이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벨베데레 궁전이 소장한 클림트의 ‘키스’, 그리고 미국 뉴욕 모마(MoMA, 뉴욕현대미술관)의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미술관의 활동 가운데 미술관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지표가 ‘컬렉션’임을 말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 세계인들은 각자의 애호에 따라 루브르, 벨베데레, 혹은 모마에서 잊지 못할 미적 감동을 경험한곤 했다.

그러나 미술관이 어떤 설립이념아래 어떤 소장품을 수집하고 무엇을 어떻게 ‘전시’하느냐를 좋은 미술관의 지표로 삼기에는 국내 미술계를 둘러싼 정황이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이름을 묻는 초보 정치인 레이건의 다급함을 정치 초보의 의욕적인 소통의지의 결과로 그저 웃어넘길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술관에 관한 ICOM(국제박물관협의회)의 정의를 새삼 상기해 볼 때, 미술관의 소장품 ‘수집’, ‘조사연구’, ‘전시’의 행위가 대중을 향한 봉사와 기여의 발언이어야 하며, 이는 결국 인류에 바치는 존경과 경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미술관 다운’ ‘미술관’일 때 ‘좋은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관의 이념과 정체성에 부합한 컬렉션을 보존, 연구, 관리 한다는 일은 미술관 종사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내년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올해를 마무리하고 내년도 예산확보를 위해 미술관 안팎이 부산하다. 적어도 ‘컬렉션’과 ‘전시’라는 미술관 활동이 이벤트와 멋진 장면의 연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술관 다운 미술관을 위한 가장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꼽씹어 본다. 좋은 미술관은 ‘멋지게 보이려’는 제스추어처럼 겉모습만 신경쓰는 것으론 가능하지 않다. 미술관 컬렉션이 대전시민의 멋진 미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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