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집도 없어서 내 집에 사는데
 네가 사는 집에 구멍은 왜 뚫냐
 너 정말이지 생각이 짧구나
 내 집 무너지면 너도 살 곳 없는데.”

조선 영조 연간 문인 권구가 지은 ‘쥐를 비웃다(조서·嘲鼠)’라는 시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풍자 문화가 쏟아진다. 풍자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모순과 적폐를 비꼬는 것. 시로, 글로, 그림으로, 노래로 현실을 비판한다. 해학과 비슷하면서도, 날이 더 서있다. 대상은 대개 권력층이나 기득권의 ‘센’쪽이다. 기지·반어·냉소·조롱·멸시·분노·증오 등 다양한 수위의 어조를 통해 빗대어 고발한다.

해학은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이다. 풍자와 해학이 담긴 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월이 하수상할 때 잘 먹힌다. 선조 연간 39세에 요절한 길 위의 선비 백호 임제는 조선 최고의 풍류객 중 하나로 꼽는다. 그는 35세 때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명기 황진이를 만나러 지금의 개성에 들렀다. 이미 황진이는 중종 연간에 단명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임제는 그녀의 묘에 술잔을 올리고 추도시를 읊었다.

“푸른 숲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구나.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낭만 가득한 그의 행동이었지만 고답적인 조선 사회는 비난을 쏟아냈다. 임제는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붕당에 비판적인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낭환집> 서문에 일화가 하나 남아있다.

임제는 부친이 성인이 된 기념으로 준 준마를 평생 타고 다녔다. 어느 날 모임이 끝나고 말을 타려 하자, 한쪽은 가죽신, 다른 한쪽에는 나막신을 신었다고 하인이 말렸다. 그러자 백호가 꾸짖었다. “길 오른쪽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 사람들은 나막신을 신었다 할 것 아닌가?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겸재 정선의 ‘서과투서’. 신사임당의 ‘초충도’와 유사하다. 둘 다 커다란 수박을 쥐가 훔쳐 먹는 모습을 그렸다. 간송미술관

미래를 예언(?) 한 조선시대 우화소설 ‘서옥설(鼠獄說)’

임제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서옥설’은 감옥에 갇힌 큰 쥐 이야기다. 조선시대 우화소설 가운데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늙은 쥐가 족속을 거느리고 나라의 곳간을 뚫고 들어가 쌀을 훔쳤다. 창고가 먼 탓에 사람들의 발길도 뜸했다. 10년을 배불리 먹고 지내다가 마침내 발각됐다. 신병(神兵)에게 붙잡혀 이윽고 재판을 받는다. 재판관은 누가 그곳에 쌀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는가를 국문한다. 교활한 늙은 쥐는 갖은 변명을 다하면서 재판관인 곳간 신의 무능함을 조롱한다. 처음에는 쌀 창고 앞의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라고 말한다. 그들을 잡아 물어보니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쥐를 다시 국문하자, 이번에는 대문과 땅을 지키는 귀신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개와 고양이라고 했다가, 흰 여우와 얼룩 살쾡이라고 말을 바꾼다. 그리고 토끼·사슴·염소·기린 등이라고 계속 거짓말을 한다. 이어 두견·앵무·꾀꼬리·나비·박쥐·참새 등의 이름을 대면서 이들이 부추겼다고 둘러댄다. 심지어 모기와 파리, 하루살이까지 등장한다. 자그마치 80여 종의 애매한 동식물을 줄줄이 거론한다. 예를 들어 밤에 작업을 할 때면 반딧불이가 불을 밝히고, 닭은 새벽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거다. 이런 식의 현란한 혀로 그들에게 죄를 덮어씌운다.

재판을 길게 함으로써 요체를 짚어낼 수 없도록 하려는 쥐의 꼼수였다. 재판관은 격분했다. 쥐를 기둥에 묶고 다섯 가지 형벌을 갖추어 처형하려 한다. 그러자 쥐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할 기회를 줄 것을 호소하면서 여러 동물들의 간사함을 얘기하고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재판관은 하늘에 올라가 상제께 소송사건의 전모를 아뢴다.

상제는 쥐를 사형에 처하고, 다른 새와 짐승들은 풀어주도록 명령한다. 억울하게 모함 당했던 동식물에게 임의로 복수를 하도록 놔뒀다. 이에 날짐승과 들짐승 및 곤충들이 잔혹한 집단 린치를 가한다. 하늘과 땅을 덮을 만큼 쥐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기린과 봉황이 급히 나서서 겨우 말렸다. 비로소 창고의 곡식이 ‘쥐도 새도 모르게’ 줄줄 새는 환란이 없어졌다.

과거 군부 독재 시절 애먼 사람을 잡는다는 말을 빗대어 ‘곰을 잡아 취조하면 쥐로 만든다’는 얘기가 있었다. 실제 당한 사람들에겐 절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가 현재까지도 종종 발생한다는 데 있다. 임제는 쥐의 소송 사건을 통해 위정자들의 무능한 행태를 풍자하고, 관료사회의 만연한 부패상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맺는다. “불은 당장에 꺼버리지 아니하면 번지는 법이요, 옥사는 결단성이 없이 우유부단하면 번거로워지는 법. 만일 곳간 신이 늙은 쥐의 죄상을 밝게 조사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더라면, 그 화는 반드시 그렇게까지는 범람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쥐의 이야기는 오늘날 시대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쥐의 사원’으로 알려진 인도의 카르니 마타(Karni Mata Temple, 쥐의 여신). 2만 마리 쥐들의 낙원으로 불린다.

쥐를 저주하는 ‘주서문(呪鼠文)’

사람은 하늘이 만든 걸 훔치는데
너는 사람이 훔친 물건을 훔치는구나
다 같이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니
어찌 너만 나무라겠나
 

<이규보, ‘쥐를 놓아주다(放鼠)’>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는 이와 벼룩까지 의인화한 글을 지었다. ‘술에 빠진 파리를 건져주다’라는 시나, 파리·모기가 너무 싫어서 조물주에게 항의하는 글은 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그는 모든 동물에게 자애로웠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규보는 원래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다. 심지어 ‘쥐를 놓아주다’라고 읊었을 정도.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규보의 집에 쥐가 떼를 지어 함부로 날뛰게 됐다. 급기야 이규보는 쥐를 저주한다는 ‘주서문(呪鼠文)’을 지어 못된 쥐들을 내치고자 한다.

“쥐들에게 묻는다. 대개 도둑은 밖에서 들어오는데, 너희는 어찌 안에 살면서 도리어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가?” 쥐가 도둑보다 더 못하다고 꾸짖는다.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는 것은 도둑과 같지만, 안에 같이 살면서 주인집에 해를 끼친다고 비난한다.

“너희를 잡는 것은 고양이다. 그런데 내가 왜 고양이를 기르지 않은 이유는 아는가? 천성이 자애로워 차마 너희에게 악독한 짓을 가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나의 이 덕성을 소홀히 생각하여 함부로 날뛴다면, 마땅히 응징하여 후회케 할 것이니 당장 내 집을 피하여 멀리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사나운 고양이를 풀어 고양이의 입술에 너희 기름을 칠하게 하고, 고양이의 뱃속에 너희 살을 장사 지내게 할 것이다.” 나중에 이규보는 검은 고양이를 얻어 길렀다.

좀도둑이냐 큰 도둑이냐

다산 정약용의 시문에도 쥐는 여러 차례 등장한다. 크게 ‘이익만 추구하는 간사한 무리’와 ‘수탈자’ 두 가지 의미로 비유했다. ‘곡식을 빼앗아 가는 동물’이나 ‘좀도둑’은 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인식에서 나왔다. ‘간교한 아전’을 쥐에 비유한 것은 <시경>에서 유래했다. ‘석서’ 편에서 탐욕스러운 수령을 큰 쥐에 비유한 이후 쥐는 백성을 착취하는 수령이나 아전을 조롱하는 말로 사용됐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좁쌀을 먹지 마라/ 삼 년을 너를 먹였거늘 나를 돌봐주지 않네/
이제 곧 그대를 떠나 저 낙원으로 가리라/ 즐거운 땅 그곳에서 내 살 곳 찾으리라

<시경, ‘석서(碩鼠)’ 1절>

‘석서(碩鼠)’는 백성을 등치는 큰 쥐다. 한 집안이나 나라의 기둥뿌리를 송두리째 흔든다. 생쥐를 이르는 ‘혜서’(鼷鼠)란 말은 <장자>에 나온다. 드러나지 않게 기둥뿌리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좀도둑이다. 새가 높이 날아 화살을 피하듯, 구멍을 파고 숨어들어 화를 면한다.

평범한 백성들은 땅을 파서 숨을 재주도, 권력이란 방패 뒤에 숨을 재주도 없다. 생쥐들을 물로 씻어버리려니 담장이 붕괴될까 걱정이고, 큰 쥐를 불로 태워 없애려니 집이 탈까 걱정이다.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기르자니, 그들과 야합을 할까 걱정이다.

그래도 세월이 변했다. 옛날과 같이 큰 쥐를 피해 이삿짐을 살 필요는 없다. 정령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 아니던가.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세상에서 지극히 천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자도 백성이지만, 세상에서 무겁기가 높은 산과 같은 백성이다. 백성을 떠받들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못할 것도 없다.”

프랑스 파리는 쥐와의 전쟁 중. 쇼핑 거리 마레 지구에 등장한 쥐. AFP

들쥐는 이삭 낟알 숨겨두고, 집쥐는 안 훔치는 것 없고

다산은 1795년(34세), 공주 창곡의 부패한 행정으로 인해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실태에 대해 듣고 지은 장편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넣었다.

“아전들 꾀는 도모하는 일마다 치밀한데, 백성들 풍속은 예로부터 순박할 따름/ 참새와 쥐가 어찌 그리 사납단 말인가? 기러기와 물고기는 절로 헐떡거리네/ 삼엄한 구중궁궐 범이 지키어, 슬픈 눈물 두 소매 젖을 뿐이네.”

이 시에서 ‘참새’와 ‘쥐’는 간교한 아전들을, 기러기와 물고기는 힘없는 백성들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됐다. 대대로 자리를 세습하는 아전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다산은 1797년(36세) 죽란사 모임에서도 “쥐 잡고 참새 쫓고, 삼 담그고 뽕나무 심고, 살림 넉넉하여 우리에 암소 있고”라고 읊었다.

정조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은 다산이 벽파들의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다. 서울 회현동 집 뜰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이름을 ‘죽란사(竹欄舍)라 붙였다. 매화, 살구꽃, 복숭아꽃, 연꽃이 필 때, 참외가 무르익을 때, 국화가 필 때면 친한 벗 10여 명이 모여 나라 살릴 길을 도모했다.

무엇보다 다산이 지독한 분노를 표출한 시는 ‘이노행·貍奴行’이다. 탐관오리들을 쥐로 묘사했다. “들쥐는 구멍 파서 이삭 낟알 숨겨두고, 집쥐는 이것저것 안 훔치는 것이 없네. 백성들은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하고, 기름 말라 피 말라 뼈골마저 말랐다네.” 1810년 지은 이 시는 우화가 아니었다. 다산이 살던 19세기 조선 후기의 실상이었다.

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고도의 지능을 가진 놀라운 생물체다. 요즘에는 서울 쥐만 달콤한 꿀을 빨지 않는다. 시골 쥐의 입맛도 쉽고 편한 음식에 길들여지고 있다. 중성화 수술을 받은 길고양이들은 쥐를 ‘소가 닭 보듯’한다. 큰 쥐이든 생쥐이든 민심을 잃은 쥐는 준엄하게 심판해야 한다. 또 잡으라는 쥐는 내버려 두고, 쥐와 야합해 백성의 양식을 훔치는 도둑고양이는 누구이던가.
 
쥐를 영어로 마우스(mouse)라 한다. 컴퓨터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왔지만, ‘마우스’는 수십 년간 비슷한 모양을 고수해왔다. 마치 쥐와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을 붙인 것. 하지만 최근 들어 새로운 입력 장치들이 속속 떠오르면서 마우스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마우스가 쥐와 닮았다고 말하기 힘들지 않을까. 마우스의 형태는 점차 쥐와 멀어지고 있다. 생태계 교란을 일으키는 뉴트리아는 마리당 지자체별로 2~3만 원의 포상금이 걸려있다.

‘너희 집과 너희 나라를 빼앗으면/ 너희는 허리를 굽혀서 절하고 나의 공덕을 찬미할 것이다. 나는 쥐덫을 만들고 고양이를 길러서 너를 잡겠다.’
만해 한용운, <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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