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사진제공=연합뉴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은 원래 요새였다. 600년 연륜 탓일까. 지금의 해미(海美) 성곽은 무미건조한 군사시설이 아니라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건축물로 느껴진다. 

해미읍성의 돌 성곽은 600여 년의 시간과 역사를 머금고 있다. 전북 고창읍성, 전남 순천읍성과 함께 '조선 3대 읍성'으로 불린다. 그렇지만 성곽이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읍성을 꼽으라면 단연 해미읍성이다.

해미 성곽의 돌들에 오랜 세월이 녹아들어서인가. 노르스름한 돌덩이 하나하나가 투명한 가을 햇살을 받아 고색창연하게 빛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인지, 해미성 안에 나들이객은 많지 않았다. 연을 날리는 어린이와 어른,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넓은 잔디광장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유럽의 여느 공원 못지않은, 그림 같은 모습이다.

잔디는 보기 드물게 촘촘하고 건강했다. 잔디는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이 상식인 서울과 달리 서산 시민들은 잔디밭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놀이와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잔디밭 자리는 옛날 병사 훈련장이었다. 이 성은 조선 전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이었다. 충청병영은 원래 덕산에 있었으나 왜구를 막기 위해 해안과 가까운 해미로 이설했다.

해미읍성은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 사이에 축조됐다. 읍성은 지방 관청과 주민이 사는 곳을 둘러쌓은 성이다.

해미는 일반 행정기능의 읍성이 아닌 군사용이었다. 성이 잘 보존된 것은 처음부터 잘 지어졌고, 성을 둘러싼 큰 전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견고한 축성에는 '공사 책임제'의 영향이 컸다. 해미성 축조 부역은 부근 고을에 할당됐는데, 각 고을은 책임 공사의 표시로 성돌에 고을 이름을 새겼다.

지금도 성 외벽을 꼼꼼히 살펴보면 흐릿해지긴 했으나 '公州'(공주) '淸州'(청주) 등의 글자가 새겨진 성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돌을 각자석(刻字石)이라고 한다.

호야 나무(왼쪽)와 재현된 옥사 (사진제공=연합뉴스)

해미성은 성 안 쪽을 향해 4∼5단 정도의 계단식 석축을 쌓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경사지게 한 뒤 내벽을 만들었다. 이 벽에 의지해 수직이 되도록 외벽을 쌓았다.

해미성은 충무공 이순신이 복무했던 곳이다. 1576년(선조 9)에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은 권관과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세 번째 관직으로 1579년 충청병마절도사 군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이곳에서 근무했다.

해미성은 천주교 박해와 순교의 아픔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1866)와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1868)을 계기로 심해졌다.

군사 중심지였던 해미읍성은 충청지역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는데 그 수가 1천명 이상이었다고 전한다. 읍성 안에 옥사가 재현돼 있다. 옥사 앞에는 신자들의 손발과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던 회화나무가 서 있다.

수령 300년의 이 나무는 '호야나무'라고 불린다. 호야는 충청도 사투리로 호롱불을 뜻한다. 순교자들을 '등불'로 여긴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해미읍성을 찾아 순교자들을 기렸다.

향토숲 (사진제공=연합뉴스)

성 북쪽으로 올라가니 청허정과 소나무 군락지인 향토숲이 있었다.

'맑고 욕심없이 다스리라'는 의미의 청허정에서 조선 병사들은 활을 쏘며 무예를 익혔다. 3㏊의 송림인 향토숲에는 굳센 적송이 빽빽했다. 충남의 아름다운 100대 소나무숲이다. 북쪽 성벽 뒤에 해자가 있었다.

요즘 유적지는 때에 따라 표정이 다르다. 새벽에는 사색과 명상의 장이 되고, 한낮에는 활력이 넘치며, 부드러운 조명이 켜지는 야간에는 낭만이 흐른다. 해미성도 시간대별로 다채로운 분위기를 선사했다.

새벽의 해미는 부지런히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관리인들이 파란 잔디 위에서 시민들을 맞기 위해 새날을 준비하는 새벽 풍경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조명이 켜진 밤의 성곽은 오늘의 로미오와 줄리엣들에게 매혹의 밤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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