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니,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매여 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늘의 권한을 대신 쥐고 행하면서도, 삼가고 두려워할 줄을 몰라 세밀한 부분까지 명확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죽여야 할 자를 살리고 살려야 할 자를 죽이고도 부끄러움이 없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흠흠신서(欽欽新書)’에 적은 집필 동기다. ‘흠흠欽欽’ 즉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는 뜻.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 사방이 두려운 듯 신중할 것을 강조했다. 다산은 수사와 재판이 뇌물이나 권력의 압력, 사사로운 친분 세 가지 때문에 공정해지지 않는다고 보고 어떻게 공정한 법 집행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기에 해답을 담은 책이 바로 ‘흠흠신서’이다. 현재 검찰개혁 문제도 이 연장선에 맞닿아 있다.

평생을 6경과 사서로 수신하며 ‘1표(表) 2서(書)’를 완성해 천하의 지침을 마련하려 했던 대학자 다산 정약용. 그는 늘 시대의 아우성을 허투루 흘려듣지 않았다. 유배와 좌천은 역경도 아니었고, 터무니없는 모함과 치졸한 질시 따위는 그를 깎아내리지 못했다. 일생 동안 다산의 학문과 관직의 저변에 깔린 정신은 오로지 위국애민(爲國愛民) 네 글자였다. 그 정신만큼은 유배 기간에도 변함없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은 정조가 승하한 다음 해인 40세 때부터 기나긴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57세에 본가로 돌아오기까지 20년 가까이를 힘든 귀양살이를 하면서 좌절은커녕 도리어 그것을 기회로 삼았다.

조선시대 프로파일러로 통하는 흠흠신서
조선시대 프로파일러로 통하는 흠흠신서

‘흠흠신서’는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이 귀향 후 저술했다. 조선의 과학수사 지식을 집대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법의학, 법해석학을 포괄하는 형법 연구서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로스쿨, 경찰공무원 준비생들이 읽는 형법 및 형사소송법 교재에 해당한다. 다산의 저서 가운데 ‘경세유표’ ‘목민심서’와 함께 ‘일표이서’라 불릴 만큼 대표적 책이다.

당시 지방 고을에서는 살인사건이 한번 발생하면 한마을이 온통 쑥대밭이 될 정도였다. 수령이 시신을 검시하고 사건을 수사하는 동안, 아전들은 백성들의 세간을 약탈하고, 무고한 백성을 감옥에 가두는 등의 비리를 저질렀다. 다산은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고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해, 사건의 판례와 수사 내용을 담은 수사 노트이자 실무 지침서를 쓰게 된 것이다. 다산은 “사람의 생명에 관한 옥사(獄事)는 군현에서 항상 일어나고 목민관이 항상 마주치는 일이다. 그런데도, 실상을 조사하는 것이 매우 엉성하고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다”는 말로 법집행관(목민관)의 방만한 의식을 질책했다. 현대의 법집행에서도 검찰과 경찰이 깊이 새겨야 할 철학이 담겨있다.

# ‘사람이 먼저다’를 앞서 외친 다산 정약용

다산의 ‘일표이서’는 가르침이 크다. 국가의 행정제도를 비롯해 문물제도를 통째로 바꾸고 고치자는 ‘경세유표’에서 오늘의 제도 개혁과 지방분권의 논리를 찾아야 하고, 상하 모든 관리들이 청렴한 공직자 윤리를 회복하고 애민과 봉공(奉公)해야 한다는 ‘목민심서’에서 부패와 타락을 막을 논리를 찾아야 한다. 또 ‘흠흠신서’에서 억울함이 없게 만드는 진정한 법철학과 인명(人命)의 가치를 배워야 한다.

다양한 학문에 일생을 바쳐온 다산의 여러 면모 가운데 법학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다. 오늘날 법학과 유사한 ‘율학(律學)’은 조선 선비들에게 등한시됐다. 잡과 시험에 율과가 있었지만 중인 이하 신분층이 주로 율학을 공부했다. 사대부인 다산은 왜 법학에 관심을 갖고 독보적인 법률 전문서적을 썼을까?

다산은 관직 생활 중 암행어사에 임명돼 전·현직 수령들의 수많은 비위행위를 목도했다. 1799년 마지막 관직인 형조참의 시절에는 정조 재위 기간 벌어졌던 형사 사건에 관한 수사, 검시, 재판 기록을 모아놓은 ‘상형고’를 엮었다. 암행어사로서 백성들의 누명을 풀어준 적도 많았다. 이런 그의 경험이 전무후무한 판례 연구서 ‘흠흠신서’를 편찬하는 데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법관의 중립적인 태도도 강조했다. 다산이 강조한 법관의 덕목으로 ‘흠휼’(欽恤)을 꼽는다. 이는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고 옥사에 연루된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철저한 진술 청취, 명쾌한 판단과 신속한 옥사 처리, 뇌물 수수 금지, 고의와 과실의 명확한 구분을 명심하라고 조언했다. 다산은 송사를 다룸에 있어 그 근본은 성의를 다함에 있다고 봤다. 다산은 목적이 없는 공부는 공부에 먹힌 ‘헛똑똑이’들만 낳을 뿐이라면서, 자신이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고민하지 않은 채 그저 과거 공부를 위해, 남들 앞에서 뻐기기 위해 책을 읽기 때문에 ‘먹물 괴물’들이 넘쳐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유배생활 18년간 고난의 시간 동안 여러 책을 저술하는데 주력했다.

다산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이 사헌부(검찰)의 보고서나 재판 서류를 근거로 나를 (죄인으로) 평가할 것이다.” 다산은 후세에 역사의 재평가를 받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산이 유배지인 다산초당에서 1817년에 완성한 ‘경세유표’에서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는 부분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고 일갈했다. 심지어 다산은 권력의 눈치만 살피는 사헌부를 폐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다산 사후 24년,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학 농민혁명이 일어났는데, 녹두장군 전봉준이 ‘경세유표’를 읽고 크게 감동받았다고 전한다. 오래된 나라를 개혁해 새로운 국가를 꿈꾸었던 다산의 ‘조선’은 이후 100년이 채 되지 않아 망국의 설움을 안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 조선시대에도 공수처 갈등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체계가 성숙되면 여러 사법기관이 정비된다. 왕조시대의 뒤떨어진 사법체제에서도 배울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신라의 사정부, 발해의 중정대, 고려의 어사대, 조선의 사헌부와 의금부 등이 현재의 검찰과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 고려 시대 공수처격인 어사대의 위상은 높았다. 어사대 수장의 직위는 장·차관급, 실제 권력은 총리급이었다. 조선 시대 사헌부는 주로 고관대작들의 비리를 파헤쳐 엄벌에 처했다. 대사헌은 사헌부의 수장이니 검찰총장, 집의는 그 다음으로 대검 차장 정도되는 직위이다. 장령과 지평은 서울 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라고 할까.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비리를 단속하는 사헌부의 지휘부가 의금부에 모두 끌려간 초유의 사건도 있었다.

오늘날의 공수처 역할을 한 의금부
오늘날의 공수처 역할을 한 의금부

의금부는 요즘의 공수처 같은 역할이었다. 검찰과 안기부의 복합기능을 지닌 채 왕권의 친위대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의 역대 국왕들은 사헌부에서 거듭 간쟁하면 이들을 의금부에 보내 조사하게 하여 견제하게 했다. 거기에는 사헌부의 전횡과 부패 예방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의금부는 왕명에 따라 반역이나 왕실 관련 사건 등 일반 수사기관이 접근하기 어렵거나 중대한 범죄를 다루는 특수기구였다. 사극에서 역적이나 왕실 인사에게 사약을 들고 가는 관원이 주로 금부도사인데, 바로 의금부의 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양 기관의 관계는 미묘했다. 업무 범위도 일부 겹치는 데다 서로 견제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사헌부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사건은 신문고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게 했는데, 신문고를 설치한 곳이 바로 의금부의 당직청이었다. 사헌부의 부실수사나 은폐 등이 확인되면 의금부에서 이첩해가는 식이었다. 또 사헌부의 수사가 불공정하다는 여론이 일면 즉각 의금부로 사건을 이첩했고, 의금부의 수사가 미진하면 사헌부가 나섰다. 즉 두 사법기관은 끊임없는 상호 견제와 감시로 어느 한쪽으로 권력이 쏠리는 현상을 방지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 시대 수사권은 사헌부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수사권을 가진 여러 기관을 상호 견제시켜 사건의 조작이나 은폐를 원천적으로 막았다.

의금부와 형조(지금의 법무부)는 물론 한성부와 포도청도 수사권이 있었다. 동일한 범죄에 동일한 형량이 부과되는 양형기준이 철저했던 조선 사법 시스템의 비결이 여기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헌부는 남을 비판하고 단죄하는 만큼 스스로 엄정한 도덕성을 요구받았다. 다른 수사 기관들과 경쟁하며 혹독한 자기 관리로 대표적인 수사기관이 된 것이다.

# 검찰개혁은 국민주권의 개념

근대 검찰제도는 프랑스 혁명의 산물로 1801년에 탄생했다. 검사가 범죄를 소추해야 판사가 재판을 한다. 1800년대 초반 소추기관에게 수사권까지 주어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결국 소추권을 가진 자가 수사권까지 갖게 되면 작은 독재자가 탄생하게 될 것이고 시민들은 공포에 떨게 될 것이라는 당시 추밀원장의 수사·기소 분리론이 힘을 얻어 오늘날 프랑스 형사사법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20세기 들어 재정 경제 범죄와 부패범죄 양상이 복잡해지자 전문 수사기관들이 생겨났다. 미국의 FBI와 독일의 중점검찰청, 프랑스 검찰의 재정경제범죄수사부, 영국의 중조직범죄수사청 등이 활동 중이다. 이들은 검찰과는 판이하게 다른 조직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검찰이 나서서 부패범죄 등을 수사한다며 일 년 내내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곳은 없다.

대한민국에서 뭐니 뭐니 해도 최강의 권력기관은 검찰이다. 국세청은 세금 사항, 국정원은 산업스파이와 정보 사항, 공정거래위원회는 경제 사항, 경찰은 생활 사항 등을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결국 징벌을 가하는 최종의 수사권과 기소권은 검찰만이 가지고 있다.

과거 일제 강점기 잔재를 그대로 물려받아 온 우리나라 검찰제도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양손에 틀어쥐고 영장 청구권마저 독점하고 있다. 임의적인 잣대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선택적으로 행사한다. 검사만이 공소제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입맛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검찰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형적인 검찰제도 탓이다. 굴곡진 현대사로 인해 대한민국은 그런 괴물 같은 검찰을 갖게 되었다.

# 검찰, 조선시대 사헌부를 본받어야

대한민국 검사 약 2000명은 여러 인맥과 계보로 얽혀 있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검찰, 특히 많은 공안검사들이 역사에 오점을 남겼지만, 어느 정권도 검찰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 역대 많은 정부가 이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공고화된 내부 반발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우리나라는 1개 이상의 ‘부패 방지기관(공수처)’ 설치를 의무화한 유엔 부패 방지 협약에 가입한지 15년째다. 전 세계적으로 공수처를 설치한 나라는 모두 56개국이나 된다. 역사적으로 망국의 공통분모는 고위층의 부정부패다. 권력과 강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기관들이 제대로 기능할 때는 나라가 바로 서지만, 제 역할을 못하면 부패로 나라가 쇠약해졌다. 모든 검찰개혁의 종착역은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주는데 방점이 있다. 국민 인권 향상의 관점에서 국민 불편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문제는 실천이다. 국민은 권력에 엄격하고, 약자에게 따뜻한 검찰을 원한다. 국민의 사랑이 있어야 검찰도 산다. 무엇보다 사법정의와 검찰개혁은 역사적 사명이다.

오늘날 검찰은 500년 전 조선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이나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이 생각했던 공정하고 정의로운 형사사법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하고, 오랜 유배에서 해배된 지 200년이 넘었다. 200년이 지난 오늘의 세상은 어떤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를 어디서 찾을 수 있기나 하는가. 정치권, 재계, 금융계, 문화계 심지어 법조계, 교육계에 이르기까지 더러운 풍토와 몹쓸 폐단이 나돌지 않은 곳이 과연 어느 분야에 있는가. 가장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자랑하는 현재의 검찰이 과연 조선시대 사헌부만큼 권력에 대한 자기관리가 철저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조선 영조시대 사헌부를 다뤘던 SBS 드라마 '해치'의 한 장면
조선 영조시대 사헌부를 다뤘던 SBS 드라마 '해치'의 한 장면

<박승규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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