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거칠고 못난 성질을 이야기하다가, 제 자신을 사슴에 비유했군요.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사슴이 잘 놀란다는 의미이지, 감히 제가 잘난체하거나 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 그대의 편지에서 스스로 말꼬리에 붙은 파리에 비유하고 계시니, 어찌 그렇게 자신을 하찮게 여기시나요? 만약 그대가 작게 되기를 바란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지요. 개미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일찍이 약산(평안도 영변)에 올라 산 아래 고을을 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달음질치고 땅에 붙어 꿈틀꿈틀하는 모습이 마치 개미집의 개미와 같더군요. 바람이 한번 휙 불기만 해도 다 날아갈 듯싶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을 사람더러 저를 바라보라고 한다면, 산비탈을 기고 바위를 돌고 다래 넝쿨을 움켜쥐고 나무를 붙잡고 산꼭대기까지 올라와서는, 함부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머리의 이가 머리카락을 따라 기어오르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고서도 큰소리로 제 몸을 사슴에다 비유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마땅히 대가(大家)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겠지요.

만약 몸뚱어리의 크고 작은 것을 따지려 하고, 시력이 좋고 나쁨을 변별하려 든다면 그것들은 모두 허망한 생각입니다. 사슴이 과연 파리보다야 크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습니까? 파리가 사슴보다는 작지만, 개미와 비교한다면 사슴과 코끼리의 관계와 같습니다. 예전에 코끼리가 서 있는 모습을 보니 크기는 집채만 하고, 움직이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고, 귀는 구름을 드리운 것처럼 넓으며, 눈은 초승달과 비슷하고, 발가락 사이에 낀 진흙덩이는 봉긋한 둔덕 같더군요. 개미가 그 속에서 집을 짓고 살다가, 비가 오는지 살피러 밖으로 나와서 두 눈을 부릅뜨고도 코끼리를 보지 못함은 무슨 까닭일까요? 보이는 대상물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지요.

또 코끼리가 한 눈을 찡그려도 개미를 잘 보지 못함은 어째서 그럴까요? 보이는 대상물이 너무 가까운 탓이지요. 설령 조금 넓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 있더라도 백 리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게 한다면, 아득하고 가물가물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사슴이나 파리, 개미와 코끼리를 구별해낼 수 있겠습니까? <연암 박지원, ‘아무개에게 답함’>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세운 북경 천주당(남당)외관 모습. 1904년 재건한 바로크식의 웅장한 아치형 문을 자랑한다.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세운 북경 천주당(남당)외관 모습. 1904년 재건한 바로크식의 웅장한 아치형 문을 자랑한다.

■ 날 개미에 견준다면 그대는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연암의 글이 대부분 그렇듯, 이 글 또한 매우 의미심장하다. 앞서 연암이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을 사슴으로, 상대방을 파리로 견준 모양이다. 상대방은 자신을 하찮게 본다고 여겨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 연암은 즉시 해명하는 답장을 보냈다. 크고 작음은 상대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인간 세상 다툼과 오해는 언제나 남과 비교하거나, 서로를 비교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크고 작음, 멀고 가까움은 모두 상대적일 뿐이다. 산에서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개미로 본다. 반대로 아랫마을 사람들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머리카락에 붙은 이로 여긴다. 서로를 하찮게 여기는 것은 피차일반 아닌가?

지구에서 달을 보면 달은 단팥빵 크기다. 달에서 지구를 본다면 지구 크기 역시 단팥빵 크기에 불과하다. 이른바 역지사지.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처한 환경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든다. 그러다 보니 제 것만 좋고, 남의 것은 우습게 보인다. 모든 문제는 언제나 ‘그 사이’ 경계에서 생겨난다. 세상을 바라보는 연암의 시각은 큰 것과 작은 것,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의 잣대가 남달랐다.

사슴이 크다 한들 코끼리에 비하면 지극히 작다. 파리가 작다 해도 개미에 비하면 훨씬 크다. 개미가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코끼리를 보지 못하고, 코끼리 역시 눈을 아무리 가늘게 떠서 초점을 맞추려 해도 개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은 평등적 인식론 개념까지 확장된다. 코끼리를 예로 들은 걸 볼 때, 위 편지는 연암이 열하를 다녀온 후 쓴 것 같다. 연암은 코끼리가 무척 인상 깊었나 보다. 코끼리에 대한 견해를 <열하일기>에서 ‘상기(象記)’ 등 별개 기문으로 다뤘다. 연암은 코끼리를 통해 인간의 한정된 경험 세계로는 쉽게 속단할 수 없는 만물의 이치에 대한 깊은 사유를 펼치기도 했다.

연암은 “코끼리가 호랑이를 만나면 코로 쳐서 죽이니, 코끼리 코야말로 천하무적이다. 하지만 생쥐를 만나면, 그만 그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로 쳐들고 서 있을 뿐”이라고 항간의 속설을 든다. 호랑이야말로 산중의 왕으로 위세가 당당하다. 그러나 코끼리는 단 한 방에 그와 같은 고정관념을 깨트려 버린다. 덩치 큰 코끼리도 생쥐 앞에는 맥을 못 추고 만다. 그렇다고 생쥐가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홍대용과 교분을 맺은 청나라 문인 엄성(嚴誠)이 그려준 홍대용 초상. 홍대용은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엄성과 특히 가까웠다.
홍대용과 교분을 맺은 청나라 문인 엄성(嚴誠)이 그려준 홍대용 초상. 홍대용은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엄성과 특히 가까웠다.

■ 영변에 약산, 피지 않는 진달래꽃

연암이 지은 유명한 <호질>의 첫머리도 그러하다. 천하무적 위엄의 상징인 호랑이를 잡아먹는 상상 속의 동물이 무수히 등장한다. 이 역시 산중 제왕의 권위가 절대적이지 아님을 암시한다. 연암의 의도는 아마 이럴지 않을까? 이 세상에는 절대강자도, 최고의 승자도 없으니 모두들 똑같은 가치를 매겨 상대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 편지에서 연암이 올랐던 약산(藥山)은 평안북도 영변에 있다. 평양에서 북쪽으로 100km 정도. 김소월의 시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의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북한의 주요 원자력 연구소와 핵시설이 위치한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요즘도 영변 약산의 진달래는 봄이 되면,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피처럼 붉게 물든 진달래가 바위산을 덮어 온 산이 불타는 듯한 장관이 일품이라는 것. 관서팔경인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 사라지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기원한다.

<열하일기> ‘도강록’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연암은 벽돌로 지은 성곽을 관찰하면서, 동행한 정 진사에게 의견을 묻자 “벽돌은 돌만 못하다”고 대답한다. 연암은 답답한 나머지 열변을 토하면서 벽돌이 돌보다 유리한 점을 조목조목 말한다. 그런데 정 진사는 말을 다 듣지도 안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말 등에서 꼬부라져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연암이 부채로 옆구리를 꾹 찌른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웬 잠만 자고 듣지 않아”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화들짝 잠에서 깬 정 진사가 웃으며 말하길, “내 벌써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느니!”라고 대답한다. 연암은 화가 나서 때리는 시늉을 하고,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는 일화다.

당시 선비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성은 돌로만 쌓는다는 고정관념이 박혀 선진 문물을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다산 정약용이 거중기 등을 동원해 수원 화성을 벽돌로 쌓은 것은 그로부터 14년 후 일이다. 오죽하면 연암이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그 맛을 이야기할 수가 없으며, 이웃 사람의 담비 가죽 옷을 부러워해서 한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때(시절)를 논할 수 없다”고 했을까. <이덕무에게 써준 ‘영처고’ 서문>

■ 코끼리와 낙타, 그리고 새로운 세계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뒤늦게 서구에 개방한 나라였다. 연행은 조선의 지식인이 중국을 통해 세계 문명을 호흡하는 현장이었고, 북경 천주당은 서학(西學)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홍대용이 북경, 당시의 연경에 간 것은 1765년(영조41) 나이 35세 때. 그의 연행 이후 13년이 지난 1778년엔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경으로 향했다. 1780년엔 연암이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10년 뒤 박제가는 유득공과 함께 다시 연경에 갔고, 박제가의 제3차 연행은 1801년에 있었다. 그리고 박제가의 제자인 추사 김정희가 연경에 간 것은 1809년이었다.

1776년 1월 홍대용은 연경에 도착하자마자 마테오 리치가 세운 천주 교회당을 방문하여 독일인 신부를 만나 서양 천문과 달력 만드는 법에 관해 물음을 구했다. 홍대용과 연암 등이 쓴 연행록에 담긴 이색 풍경에는 천주당에서 목도한 서양화, 천주상, 기이한 동물 등이 주된 내용을 차지한다. 홍대용은 눈이 어지럽고 마음이 놀라웠다고 고백한다. 실로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는가?” 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홍대용은 북경에서 본 기이한 동물로 코끼리와 낙타를 꼽았다. <열하일기>나 박제가의 <북학의> 같은 책도 홍대용의 <연기>가 있었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 홍대용은 1774년 세손 시절 정조의 가정교사를 맡기도 했다. 지동설을 주장할 정도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30대 초반에 이미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와 자명종을 만들고,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을 고향 수촌에 지었다.

1783년 홍대용이 53세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자 연암은 손수 염을 하고, 묘지명을 쓰면서 이렇게 술회했다. “서양 사람이 지구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덕보(홍대용)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 학설이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어깨 부딪치고 수레 이어지는 만국의 중심으로/

높다란 낙타 거대한 코끼리 산악처럼 서 있네/

인생살이에 시야를 좁혀서는 안 되니/

안목을 넓혀야 흉금 또한 넓어지는 법/

우리나라는 도를 강론하기 비좁으니/

사해의 인재들과 교류하는 게 소원일세

이덕무가 지은 시평집 ‘청비록·淸脾錄’에는 ‘농암과 삼연이 중국을 그리워하다(農巖三淵慕中國)’라는 제목으로 농암 김창협의 동생인 삼연 김창흡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숙종 38년 큰형 김창집이 사은사로 청나라에 갈 때 따라가서 견문을 넓혔다.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 ‘천원지방’ 수직적 진부한 관념을 타파하다

홍대용의 북경 여행기인 <을병연행록>에는 한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바로 ‘부끄럽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는 점이다. 홍대용은 조선이 의복 등 풍속을 지키고 있는 것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찾으려 한다는 실정과 청나라를 멸시하고 화이론을 고집하는 현실을 반성하기 위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들고 나왔다. 그는 “조선은 ‘예의도 모르는 오랑캐’에게 굴복한 일을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조선의 낙후된 현실과 편협한 마음을 부끄러워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상기시켰다. 다시 말해 조선은 무엇이 부끄러움인지, 또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게 홍대용의 지론이었다.

연암 그룹들의 순차적인 연행은 세계 인식을 심화하고, 사물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이들의 관점은 사랑방에서 ‘매·난·국·죽’만을 그리거나 송나라 ‘임포의 학’만을 동경하는 협소한 세계관에서 벗어난다. 만물이 천(天)의 소산이라는 성리학적 자연관, 중국 중심의 지리관을 넘어선다. “요동에서 서쪽을 향해 300리를 걸어가니, 모두가 평탄한 땅이 무한히 끝이 없다. 태양이 지평선에서 떠올랐다가 광야에서 사라진다. 요동의 대평원을 지나가 보지 않고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설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홍대용, 의산문답(醫山問答)>

조선은 산이 많은 나라로 광활한 평원이 없다. 홍대용은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 위에서 시계(視界)의 한계를 체험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논증했다. 노자는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不出戶知天下·도덕경)’고 주장했다. 도(道)를 깨치면 능히 천리를 내다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북학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천원지방·天圓地方)’에 사로잡힌 고루한 우주관을 타파했다. 천문과 지리에 관한 인식의 변화가 기존 ‘천하(天下)’에 대한 관념을 수정케 한 것이다. 1644년 청나라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지면서 시작된 연행은 1876년 조선이 개항하기까지 무려 673회에 이른다. 연행길은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 접속해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굽어보는 촉매가 됐다. 연행길 도중의 이계 체험은 유튜브요, 중국 선비들과 필담과 교류는 그 시대의 카카오톡이자 페이스북이었다. 연암과 북학파들은 평생 ‘꼰대’가 아니었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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