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한 누각으로 들어갔다. 연암 박지원이 18~19세 시절이었다. 마치 관청 건물이나 절간의 대웅전 같았다. 좌우에 비단으로 덮은 상자와 서가가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화병에 꽂힌 채 지붕에 닿을 만한 푸른빛의 새 깃털을 보았다. 공작이었다. 훗날 연암은 생계형 관직에 나가 1791년 경상도 안의 현감으로 부임했다. 연암은 그곳의 아름다운 산수에 무척 만족해했다. 이때의 일을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관아 한 곳에는 2층으로 된 창고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퇴락한지 이미 오래됐다. 연못을 파고 아래위로 개울을 끌어들였다. 물을 채워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었다. 은연중 물아일체의 흥취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못 가에 집을 짓고 벽돌을 구워 담을 쌓았다. 이는 중국의 집 짓는 법을 본뜬 것이었다. 긴 대나무와 무성한 숲은 푸른빛을 띠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집에는 각기 이름을 붙였는데 하풍죽로당, 연상각, 공작관, 백척오동각이다.”

연암은 관아의 빈터에 ‘공작관’이라는 정각을 짓고, 북쪽 연못의 물이 흘러넘쳐 그 앞을 지날 때는 곡수(曲水)가 되게 만들었다. 흥겨운 날에는 연잎을 따서 그 위에 술잔을 실어 띄워 흐르게 했다. 그러나 연암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이 건물들을 지은 게 아니다. 사실 풍류를 위해서라면 전통 목조건물을 지으면 되지, 굳이 벽돌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 연암이 지은 건물은 북학의 상징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공작의 깃. 일정한 패턴 문양이다 (왼쪽은 인도공작, 오른쪽은 자바 공작)
공작의 깃. 일정한 패턴 문양이다 (왼쪽은 인도공작, 오른쪽은 자바 공작)

■ 공작 깃은 변화무쌍하다

‘공작관’은 ‘연암’ 이전의 그의 호. 1768년(32세) 연암은 백탑(지금의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근처로 이사했다. 집 당호(堂號)를 ‘공작관’이라 하고, 자호로도 삼았다. 이 시기에 연암과 그의 그룹들은 ‘백탑파’를 이뤄 활발하게 교류했다. ‘공작관’은 젊은 시절부터 연암의 로망이 담긴 이름이었다. 그가 새삼스럽게 관아 건물의 명칭을 공작관이라 명명한 이유는 체질적으로 고정적·불변적인 것을 거부한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비록 작은 건물일지언정 연못의 물을 흐르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보이는 경치가 다르며, 보는 지점에 따라서 경관이 달라 보였다.

연암은 세상이나 사람을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을 갖고 보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 푸른 까마귀든지, 붉은 까마귀든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 또한 특정 계층에 한정되지 않았다. <공작관기>는 중국 여행 중에 본 공작 3마리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는 데서 시작한다. 연암이 공작을 보았다면, 아마 북경의 새 시장 ‘채조포(綵鳥舖)’에서 봤을 것이다. 채조포는 갖가지 새들을 파는 ‘새 종합 상가’이다. <열하일기>를 비롯해 그의 문집에 등장한 모든 동물에 대해 그렇듯, 공작에 대한 묘사 역시 꼼꼼하고 기막히다.

“학보다는 작고, 백로보다는 크다. 꼬리는 두 자(60cm) 남짓. 정강이는 붉고, 뱀이 허물 벗은 것 같다. 부리는 검은데 매처럼 안으로 오므라들었다. 온몸의 깃털은 불이 타오르듯, 황금이 반짝이듯 고왔다. 깃 끝에는 각각 하나씩 황금빛 눈이 박혀 있다. 중간에는 파란빛으로 눈동자를 찍었고, 자줏빛이 겹겹이고, 바깥 테두리는 쪽빛이다. 자개처럼 아롱지고 무지개가 뻗는 듯하다. 물총새도 아니요, 붉은 봉황도 아니다. 이따금 움츠렸다가, 깃털을 흔들면 되살아났다. 잠깐 나래 치면, 비췻빛으로 바뀌었다가 금세 활짝 깃을 펴자 마치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 연암 글의 특징은 섬세한 관찰과 독특한 사물 인식이다. 이 같은 선구안을 가지고 연암은 자신만의 영역을 세워 나갔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Think Different’를 외치기 200년 전, 이미 연암은 새로운 사유 방식을 시도한 것이다.

공작도 두 날개로 난다.
공작도 두 날개로 난다.

■ 미리 정한다면 바로 보는(정견·正見) 게 아니다

연암은 공작 깃의 변화무쌍함을 서술하면서도, 모든 사물은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글을 지을 때 종이와 묵에 얽매이다 보면 바른 글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색깔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에 선입관이 있다면, 올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릇 색깔(色)이 빛(光)을 남기고, 빛이 빛깔(輝)을 낳으며, 빛깔이 찬란함(耀)을 낳고, 찬란한 뒤에 환히 비친다(照). 환히 비친다는 것은 빛과 빛깔이 색깔에서 떠올라 눈에 넘실거려서다. 그러므로 글을 지으면서 종이와 먹을 떠나지 못한다면 정확하고 합리적인 말이 아니다. 색깔을 논하면서도 마음과 눈으로 미리 정한다면 바로 보는(정견·正見) 게 아니다.”

그는 공작의 깃을 보면서도 다양성에 기반한 사유의 끈을 놓지 않는다. <능양시집서>에서 주장하듯이, “푸른 까마귀라 해도,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좋다”라는 게 연암의 지론이었다. 모든 사물은 보는 주체의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으며, 인식하는 대상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눈으로 색깔을 보는 것은 다 같다. 그러나 빛깔이나 찬란함에 있어서는 보고도 똑똑히 보지 못하는 자가 있고, 똑똑히 보고도 잘 살피지는 못하는 자가 있다. 살피고도 입으로 형용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 것은, 눈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심령(心靈)에 트이고 막힘이 있기 때문이다.”

연암은 한갓 공작의 깃에서부터 출발해 대상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본질을 파헤친다. “종이와 먹을 가지고 흑백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는 장님이요, 흑백은 구분하지만 그것이 글자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어린애요, 그것이 글자임은 알지만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자는 노예요, 겨우 소리를 내어 읽어도 반신반의하는 자는 시골의 서당 선생이요, 입으로 술술 읽어 그전에 기억하던 것을 외우듯 하면서도 덤덤히 마음에 두지 않는 자는 과거 시험장의 서생이다.”

연암은 인간도 물질세계의 일원이고, 인간에게는 기타 물(物)의 속성이 다분히 구비되어 있다고 봤다. 그는 물질세계는 영원한 운동 상태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고정불변은 사물의 사멸을 의미한다고 간주했다. 또 물질이나 사물은 변화하는 가운데 낡은 것이 부단히 소멸되고, 새로운 것이 부단히 생겨난다고 여겼다. 연암은 그런 관점 아래 사물과 인간과 역사를 바라봤다. 열하를 다녀온 후, 연암의 시선은 이미 중국을 넘어섰다.

■ 조선 시대에도 공작이 있었나?

결론부터 말하면 ‘공작’이 있었다. 외교 선물로 들어온 것이다. 1406년(태종6) 7월 1일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무역 사절단 ‘진언상’이란 자가 군산 앞 선유도 인근 바다에서 왜구에게 약탈당했다. 그는 지금의 자바를 중심으로 한 ‘조와국’, 즉 ‘마자빠힛’ 왕국의 사신이었는데, 2번째 방문 길에 왜구의 해적질에 당한 것이었다. 이미 1394년 태국 무역상 ‘장사도’와 동행해 조선에 왔던 적이 있었다. 1406년 5월 22일, 일행 120명과 자바를 출발한 진언상은 해적을 만나 80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됐다. 무역선에 실었던 공작·타조·앵무·잉꼬 등의 진귀한 새와 물품을 몽땅 뺏기고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진언상은 태종의 호의로 옷과 신발, 소형 선박 등을 얻어 조선을 떠났다.

그런데 진언상이 9월 16일 조선에서 배를 빌려 귀국한 지 열흘 후였다. 대마도 도주 ‘종정무’가 공작과 후추 등을 바쳤다. 그들은 “남쪽 오랑캐의 배를 약탈해 얻은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배는 바로 7월 진언상이 타고 온 무역선이었다. 대마도주가 태종에게 바친 공작은 원래 자바 ‘마자빠힛’ 국왕이 조선에 보내려던 외교 선물이었다. 태종은 그 공작을 왕실 동물원이라 할 수 있는 ‘상림원’에서 길렀다. 창덕궁 후원인 상림원은 지금의 ‘비원(秘苑)’이다. 공작의 수명은 야생에서는 20년, 동물원에서는 40~50년 정도 산다.공작은 주로 나무 열매와 벌레 따위를 먹으며 산다. 곡류, 과일, 풀씨 등도 먹고, 때로는 개구리나 뱀 같은 파충류, 곤충도 잘 먹는다. 닭과 거의 같다

동물 중에는 암컷에 비해 유난히 화려한 수컷이 많다. 닭과 꿩, 원앙도 수컷이 멋진 깃털을 뽐낸다. 대표적인 동물은 공작. 수컷이 꽁지를 펼치면 아름다운 오색 깃털이 부채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공작 꽁지라고 생각하는 깃은 사실 허리에 난 깃털이다. 칠면조의 부채 모양 꼬리도 허리에 나있는 깃털이다. 대부분 수컷 새들은 왜 화려할까? 수컷의 깃털이 길고 무늬가 많으며 선명할수록, 암컷을 유혹하는데 유리하다고 한다. 수컷의 화려한 겉모습은 암컷의 주목을 끌기에 유리하지만, 자칫 천적에게 들키기 쉽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생존력이 높다는 증거가 된다. 천적의 눈에 띄는 모습을 해도 야생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수컷 공작은 화려한 꼬리를 계속 진화시켰다. 그런데 연암은 수많은 새 중에 왜 하필 공작에 관심을 두었을까? 공작은 날개가 오색이다. 오행설(五行說)과 관련해 현세에 있는 조류 중 왕좌를 차지한 길조라고 생각했다. 또 이를 흉배에 수놓으면 성군을 모시는 충신이 된다는 뜻이 담겼다. 시대에 따라 흉배는 조금씩 변했지만, 문관 1품 영의정의 흉배에는 공작이나 두루미(학)을 새겼다.

봉황의 문화원형은 공작이다. 봉황을 그릴 때는 대개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함께 그렸다. 봉황은 오동나무 아래 깃들고 삼천 년 만에 한번 열린다는 대나무 열매인 죽실(竹實)을 먹고산다고 전하기 때문. 그래서인지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내가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무심한 일편명월이 빈 가지에 걸렸어라”는 옛 시가 전한다. 삼성 리움 미술관 화조도.
봉황의 문화원형은 공작이다. 봉황을 그릴 때는 대개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함께 그렸다. 봉황은 오동나무 아래 깃들고 삼천 년 만에 한번 열린다는 대나무 열매인 죽실(竹實)을 먹고산다고 전하기 때문. 그래서인지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내가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무심한 일편명월이 빈 가지에 걸렸어라”는 옛 시가 전한다. 삼성 리움 미술관 화조도.

■ 물속에서 살면서 물을 잊어버리는 물고기

연암은 뛰어난 문장가이기에 앞서 탁월한 사상가다. 여러 가지 이유들 중의 하나는 모든 자연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이다. 관점의 다양성은 사고의 다양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연암은 까마귀를 보면서도 햇살에 따라 달라 보이는 까마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야기한다. ‘까마귀는 검다’는 고정 관념을 거부한다. 연암의 정신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법고창신(法古創新)’과 ‘예실구야(禮失求野)’의 결정체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자’는 의미로 요약된다. 공자는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고 했다. 연암은 양반사회의 상실된 예를 재야, 즉 서민사회에서 구했다. 연암은 “글을 지으면서 종이와 먹을 떠나지 못한다면 정확하고 합리적인 말이 아니다.

색깔을 논하면서도 마음과 눈으로 미리 정한다면 정견(正見)이 아니다”라고 설파했다.(공작관기 중) 진실은 늘 가까운 곳에 있지만, 일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신이 아닌 보통 사람이 ‘바르게 본다는 것(정견·正見)’은 불가능 한 일이다.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하네. 그 이유를 아는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라서 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자네의 서재에 전후좌우 책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네. 그러니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니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밖에.” 연암이 제자 이서구에게 꾸짖은 말이다. <소완정기 中>

‘장자’ 사상에서 물은 ‘도’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흔히 쓰이는 자연물이다. 충만한 상태의 물에서 물고기는 스스로 물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 혜택을 누린다.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도리가 필요한 속에서 살면서도 도리를 잊고, 물고기는 물속에 살면서도 물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깊이 보고,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진짜에 가까워지는 길이지, 진짜를 볼 수 있다는 말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바르게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게 올바른 길 ‘정도(正道)에 가깝지 않을까. 공작은 꼬리가 무거워 대부분 사람들은 공작이 날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공작도 난다. 새는 좌익과 우익, 양쪽의 날개로 난다.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한 쪽으로 너무 기울어져 있는가?

<문화평론가 박승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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