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언제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왔을까? 지난 2004년 프랑스 과학자들이 지중해 키프러스 섬에서 9500년 전의 고양이 유해를 발견했다. 인간의 유해와 나란히 있었고, 귀중품이 함께 묻혀 있던 걸로 봐서 고양이가 죽은 이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다. 프랑스 과학자들의 발견은 인간이 농경 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고양이를 애완용으로 길들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곡식을 탐내는 쥐를 쫓으며 인간과 함께 생활해온 것.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신으로 숭배했다. 사자 몸통으로 알려진 스핑크스는 본래 고양이다. 주인이 죽으면 주인의 무덤에 함께 넣기도 했다. 고양이와 주인이 같은 무덤에 있으면 함께 사후세계로 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일강을 오르내리는 배에도 고양이를 태웠다. 식량을 축내고 밧줄과 목재를 갉아먹는 쥐를 잡기 위해서다.

고양이를 신성시했던 이집트와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고양이를 죄악시했다. 고양이는 악마의 사자로 표현되는 나쁜 짐승이었다. ‘공포의 검은 고양이’는 기독교 문화에서 전파됐다. 검은 고양이는 마녀가 변한 모습으로 간주했다. 고양이는 이슬람에서는 숭배받는다. 잠이 든 무함마드를 뱀이 물려고 하자 고양이가 뱀을 물리쳐 막아준 뒤로부터 고양이를 특별한 동물로 아꼈다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에 고양이는 언제 들어왔을까? 대개 6세기경 삼국시대, 불교와 함께 들어왔다고 여긴다. 쥐로부터 불경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풀이한다. 중국 당나라 시절 양귀비는 애완동물로 개와 고양이를 길렀다고 전해진다. 고양이는 중국과 우리나라 왕실에서 공주와 후궁들에게 인기 높은 애완동물이었다. 특히 금묘(金猫), 황금빛 고양이는 희귀한 애완동물로 가치가 매우 높았다. 1417년(태종17) 11월 24일 실록에 따르면,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 이 금색 고양이를 얻으려고 그 주인인 신효창을 협박까지 했다. 신효창은 관찰사와 동지총제 등을 역임한 고위 대신이었다. 신하의 집에서 왕세자가 고양이를 내놓으라고 닦달을 한 셈이다. 전 세계 고양이는 40여 종류.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고양이는 유전적으로 태국이 원산인 샴고양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 고양이 궁중도.
당나라 시대 고양이 궁중도.

■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한 백성들

다산 정약용이 쓴 ‘이노행(貍奴行)’이란 장편 우화시 하나를 살펴본다. 이 글은 쥐와 공모해 더 큰 행패를 부리는 고양이를 다루고 있다. 서울 남산골에 사는 한 노인이 고양이를 길렀다. 그 고양이는 해가 갈수록 점점 늙은 여우처럼 요사해졌다. 초당에 아껴둔 고기를 훔쳐 먹고, 항아리와 술병까지 뒤지는 등 온갖 못된 짓을 다했다. 문 박차고 소리치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지만, 등불을 밝혀보면 온통 지저분한 흔적이 가득했다. 이빨 자국 남은 찌꺼기만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밤마다 잠을 설친 노인은 맥이 다 빠졌다. 백방으로 생각해도 긴 한숨만 나왔다. 그놈의 고양이가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면 몹시도 괘씸했다. 당장에 칼을 뽑아 고양이의 목을 치고 싶었다. 하늘이 고양이를 낸 목적은 백성의 피해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하늘은 고양이를 대장 삼아 쥐를 죽일 권력을 줬다. 한 밤의 올빼미처럼 밝은 두 눈과, 보라매같이 예리한 발톱과, 호랑이처럼 톱날 같은 이빨을 줬다. 게다가 펄펄 날고 날쌘 용기까지 줬다. 쥐가 고양이를 한번 보면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날마다 백 마리씩 쥐 잡은들 누가 말리겠는가. 그래서 농사 끝난 다음에는 의관을 차리고, 큰 술잔에 술을 부어 고양이의 공에 보답하려 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쥐 한 마리 잡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도둑질에 나섰다. 쥐는 원래 좀도둑이라 피해가 적었지만, 도둑고양이는 쥐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힘도 세고 권세도 높으며 마음까지 거칠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미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은 354자에 달하는 ‘이노행’에서 만연한 부정부패를 적나라하게 풍자한다. 쥐를 잡으라고 키우는 고양이가 쥐는 잡지 않고, 도리어 도둑질에 나섰다. 그러자 쥐들도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들쥐는 구멍 파서 이삭 낱알 숨겨 두고, 집쥐는 이것저것 안 훔치는 물건이 없었다. 쥐는 훔친 물건을 모아다가 고양이에게 계속 뇌물로 바쳤다. 고양이는 쥐가 주는 뇌물을 받아먹더니 어느덧 한 패가 됐다. 한마디로 고양이와 쥐가 야합한 것이다. 이제 쥐는 마음 놓고 고양이와 행동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쥐들은 고양이의 졸개가 되어 고양이를 감싸고 호위했다. 심지어 북 치고 나팔 불고, 온갖 풍악소리 다 울렸다. 대장기까지 높이 들고 앞잡이가 됐다. 고양이는 거드름 부리면서 큰 가마를 타고, 쥐들이 굽신대는 것을 좋아했다. 백성들은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해지고, 피골이 상접해졌다.

다산이 볼 때 위정자란 좀도둑인 쥐보다 더 흉악한 도둑고양이와 같은 존재였다. 고양이가 쥐는 안 잡고, 스스로 쥐의 행태를 저지르는 것을 용납 못했다. 결국 다산은 분노가 폭발했다 “내 이제 붉은 활에다 큰 화살 메워 네놈 직접 쏴 죽이고, 그래도 쥐들이 날뛴다면 사냥개를 부르리라.” 이 글은 유배 10년째인 1810년에 지었다. ‘이·狸’는 원래 고양이와 비슷한 삵. 남산골 노인은 힘없는 백성이다. 도둑고양이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貪官). 쥐는 나쁜 하급 아전 오리(汚吏). 백성을 수탈하고, 궁궐에서 임금의 귀를 막고 국고를 탕진하는 간신 난적을 상징한다. 시인 김지하의 ‘오적(五賊)’과 비슷한 서사 구조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등의 적폐 행태를 꼬집은 시 ‘오적’은 박정희 군사 독재 시대의 뜨거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김지하는 1970년 5월 ‘오적’을 발표하고 죽음을 문턱까지 다녀올 줄 짐작이나 했을까.

김득신 ‘야묘도추’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훔침.
김득신 ‘야묘도추’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훔침.

■ 다산은 원래 애묘인(?)

조선 선비들은 동물의 세계를 관찰하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을 발견했다. 동물 관찰기를 많이 남긴 성호 이익(1681~1763)은 고양이를 보며 인생을 철학을 발견했다. 한 떠돌이 고양이는 단속을 조금 소홀히 하면 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훔쳐 먹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천성이 도둑질 잘하는 ‘나쁜 고양이’라며 잡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집 식구들이 이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많이 주며 잘 길렀다. 배부르게 먹게 된 고양이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쥐도 잘 잡았다. 사람들은 ‘좋은 고양이’라고 칭찬했다. 이익은 탄식한다. “옳은 주인을 만난 다음에 어진 본성이 나타나고 재주도 또한 제대로 쓰게 되는 것이다. 만약 도둑질을 하고 다닐 때 잡아 죽였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아! 사람도 세상을 잘 만나기도 하고 못 만나기도 하는데 저 짐승도 또한 그런 이치가 있다.”

다산 정약용 역시 고양이 자체를 혐오한 것은 아니다. 유배 기간에 쓴 산거잡흥(山居雜興) 20수 중에는 ‘아침햇살에 종이 바른 창 붉어지고/ 뛰노는 사슴과 길들은 다람쥐들 문으로 밀려온다/ 고양이도 오게 하여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불심으로 손자처럼 대한다네’란 대목이 있다. 다산이 지방 수령을 경험한 것은 단 한 번. 36세의 나이에 황해도 곡산부사를 할 때다. 다산은 지역 수령들이 창고를 관리하는 방법으로 벽돌을 쓰고, 고양이 키우기를 권장했다. 한 톨의 곡식이라도 지키기 위해서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도 도둑 잡는 일을 주 업무로 하는 ‘토포 군관(討捕軍官)’이 도둑과 야합하는 대목을 자세하게 기술했다. 도둑이 도둑질을 ‘개업’하려면 먼저 토포 군관에게 신고식을 해야 한다. 처음 세 번은 훔친 물건 모두를 상납해야 하고, 다음부터는 3:7로 나누는 게 관행이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이를 어기면 즉시 체포했다.

“무릇 토포 군관(討捕軍官)이란 모두 도둑의 두령 격이다. 군관을 끼지 않으면 도둑질을 하지 못한다. 큰 장터에 도둑을 몰아넣어 안팎으로 호응하면서 빼앗고 훔친다. 도둑 혼자만으로는 도둑질을 할 방도가 없다. 부잣집과 형세 있는 집의 의복과 기물을 도둑이 도둑질을 한다고 해도 팔 수가 없으니, 그것을 파는 것은 군관이다. 대개 장물 값이 10냥이라면 도둑이 3냥을 먹고, 군관이 7냥을 먹는 것이니 관례가 본래 그러하다. 새로운 도둑이 처음으로 그 패거리에 들어가면 으레 참알례(參謁禮·신고식)를 거행한다. 세 번 그 장물을 바치고 나서야 자기도 먹기를 꾀할 수가 있는데, 한 번이라도 어쩌다 혼자 차지했다가는 바로 관아로 잡혀오게 된다. 토포 군관이란 자들은 모두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양산박(梁山泊, 중국 산둥성 양산 밑에 있는 역명. 송나라 때 황하가 넘쳐 넓은 늪이 됐는데 도둑들이 이곳을 소굴로 삼았다)의 두령이다.”

다신이 기술한 조선 후기의 한 단면이다. 도둑을 잡는 토포 군관이 하나같이 도둑의 우두머리라고 할 정도로 한 통속이 되어 백성을 괴롭혔다. 추악한 현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를 보고 다산은 당시의 상황을 노인과 고양이, 쥐로 풍자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결국 도둑고양이의 주인은 ‘남산골 늙은 샌님’이다. 그는 힘없는 백성이다. 참다 참다 안 되면, 고양이를 죽여 버리는 카드를 택한다. 조선시대에는 고양이 가죽으로 옷도 해 입었다. 그렇다면, 사냥개는 무엇인가? 개는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속성을 가졌다. 개는 탐관오리로 은유한 고양이를 대신해 ‘백성들의 뜻을 잘 받드는 충직한 관리’라고 할 수 있다. 쥐들이 계속 날뛰면, 사냥개를 푼다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연암도 ‘세게’ 나갔다. 다산의 독설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변상벽 묘작도. 나무 아래에서 고양이가 참새를 바라보고 있다. 동경국립박물관
변상벽 묘작도. 나무 아래에서 고양이가 참새를 바라보고 있다. 동경국립박물관

■ 다산의 우화 시문은 정의감의 표출

다산의 우화 시문은 억센 서사시다. 생생한 다큐멘터리이자, 살아있는 리얼리즘이다. 난세에는 감미로운 서정시보다 억센 서사시가 시대적 역할을 더 충실하게 수행하는 법. 다산은 긴 유배생활을 통해 직접 농어민의 실상을 목도했다. 치열한 현실 인식 아래 그들의 편에 서서 수많은 시문들을 창작한다. 감미로운 서정 속에 가시가 숨겨 있다. 다산의 날카로운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연을 소재로 많은 한시를 창작했지만, 그들의 자연은 반사회적이고 관념적 공간이다. 매란국죽이요, 음풍농월이다. 그러나 다산의 시에 그려진 자연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나’를 포함한 우리 ‘이웃’의 맨 얼굴이고, 이 땅의 농민과 어민이고, 삶의 애환이 스며 있는 생활 현장을 담았다.

다산의 시는 그의 실학사상과 분리할 수 없다. 특히 유배 기간에 쓴 여러 우화 시문은 비유적인 풍자가 두드러진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사회시(社會詩) 또는 ‘민중시인’의 효시라 할 만하다. 다산의 애민정신과 정의감은 그의 대부분 시문에서 나타난다. 수탈에 못 견딘 백성이 스스로 거세한 ‘애절양’ ‘파리를 조문한다’ ‘송충이’ ‘범고래의 공격’ 등에 일관되어 녹아있다. 굶주려 신음하는 농민의 삶을 보일 듯 그렸다.

다산은 수많은 우화시를 통해 더욱 통렬하게 탐관오리들을 비판했다. 권력에 붙어 권세를 누리는 염량세태를 꾸짖고, 무능한 위정자들을 경고했다. 무엇보다 사회적 모순을 관념적 개탄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시문은 병든 현실에 대한 임상 보고서이자, 처방전인 셈이다. <목민심서> 상징되듯, 다음 세대를 위한 이정표를 구체적이고 충실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다산의 위대함이 돋보인다. <목민심서>가 완성된 1818년의 가을, 해배 소식이 날아들었다. 유배가 풀렸다. 음력 8월 그믐날, 제자들이 송별연을 마련했다. 다음날, 다산은 강진을 출발해 13일이 지나 고향에 도착했다. 18년 만이었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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