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근 대전시의원
남진근 대전시의원

옛 목욕탕은 추억의 공간이다. 아파트가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지 않았던 시대, 대중목욕탕은 동네 주민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목욕은 연중행사였다. 일가족이 모이는 명절은 다 함께 목욕하기 좋은 날이었다.

집집이 목욕 시설이 잘되어 있는 요즘은 공중목욕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날씨가 추워지면 더 이상 집에서 목욕할 수 없어 대중탕으로 가야 했다. 두세 시간 뜨거운 탕에 머물며 추위에 튼 손과 온몸에 쌓인 때를 밀어내는 행사(?)를 치러야 그 비싼 목욕비 본전을 뽑은 것 같았다.

어릴 적 시골 목욕탕은 달랑 하나였다. 설과 추석 같은 큰 명절을 앞두고는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였다. 그래도 새까만 시골 아이에게 목욕은 너무나 호사였다. 목욕한 다음에는 바로 옆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이따금 대도시에 나와 목욕할 때면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당시 문화 활동의 첫 단추가 바로 목욕이었던 셈이다.

목욕탕 굴뚝은 전성기에는 동네의 상징이었다. 대부분 지방 목욕탕은 지역에서 주변 건축물 중 가장 높은 굴뚝이 우뚝 솟아있었다. 그러나 동네 공중목욕탕이 사라진 지금, 덩그러니 남은 굴뚝의 초상은 처량하다. 대전 신안동의 신안 목욕탕이나 오아시스 목욕탕 등이 그러하다. 전형적인 붉은색 벽돌 굴뚝으로 밑에서부터 위로 점점 좁아지는 구조다. 둥근 형태의 목욕탕 굴뚝은 경상도 지방에, 사각형은 중부권에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목욕탕 굴뚝을 잘만 활용한다면, 지역의 랜드마크 건물로 가치가 충분하다.

도시는 늘 변한다. 도시 공간도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의 시작에 문화적 도시 재생 방법이 주목받고 있다. 무조건 밀어버리고 새롭게 짓기만 하면 되던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공간의 재해석만이 사람 냄새나는 도시를 만든다. 새로운 건물보다는 옛 공간들이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인간미를 풍기는 골목이 뜨고 있다. 사람들이 떠난 동네에선 사랑방이었던 목욕탕도 손쓸 틈 없이 쇠락했다. ‘사람을 품은 도시’는 바로 도시 재생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문 닫은 목욕탕을 마을 도서관 등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2000년대 이후 동네마다 들어선 사우나, 찜질방에 밀려 설 곳을 잃어가던 대중목욕탕이 새로운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폐업한 목욕탕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리모델링한 명소가 화제다. 충북 청주에는 ‘학천탕’이라는 목욕탕이 ‘핫플레이스’가 됐다. 국내 건축계 거장 김수근 선생의 설계로 유명하다. 1988년 문을 열 당시 청주에서 가장 큰 목욕탕으로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았다. 학천탕은 2019년부터 ‘카페 목간’을 열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전북 군산의 ‘영화장’은 미술관으로,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행화탕’은 카페와 문화 공간을 갖춘 팔색조로 변신했다.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재창조된 공간이 굴뚝은 물론이고, 내부 타일 등 목욕탕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 대구 동성로의 목욕탕은 8명의 크리에이터들이 문화 플랫폼으로 만들었다. 부산 감천마을 ‘감내어울터’는 종전 마을 목욕탕인 ‘건강탕’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소통센터로 탈바꿈했다.

“나를 키운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다”라고 빌 게이츠는 스스럼없이 말한다. 요즘 도서관은 책 읽는 공간으로만 머물지 않고 있다. 작은 도서관은 아파트 단지와 작은 동네의 문화 실핏줄 역할을 하고 있다. 공공도서관의 틈새를 메우는 작은 도서관은 경제학적 기회비용으로 보면 가장 효율적 공간이다. 옛 목욕탕을 공공기관에서 매입해 주민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재개발과 철거의 광풍을 비켜난 목욕탕에서 사람들과 같이 ‘예술로 목욕재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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