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환 충남대학교 회화과 명예교수, 한국화가.
윤여환 충남대학교 회화과 명예교수, 한국화가.

요즘 대선정국이 국민을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해놓고 민심을 둘로 갈라놓아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분쟁 정당 간 비방성 사건의 격돌과 정치적 이슈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며 판단력까지 흐리게 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를 연상케 한다.

조선시대 정치사를 보면 치열한 붕당 간의 대립이 세도정치로 발전해 망국의 길을 초래했다. 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자화상으로 녹여냈던 조선 후기 선비 화가가 있다.

자화상 그림이 국보로까지 지정된 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윤선도의 증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이다. 그는 해남의 대부호 가문 출신답게 부유했고,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영특했으나 진사에 급제한 다음 해인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해남 윤씨는 남인 세력으로 윤두서도 당쟁의 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셋째 형이 거제도로 유배됐고, 윤두서 자신도 서인의 음모로 역모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다행히 무고로 풀려났으나 세상에 환멸을 느낀 윤두서는 벼슬을 포기하고 1713년 고향 해남 녹우당으로 돌아와 남은 일생을 학문과 시서화로 보내며 살다가 2년 뒤 48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다.

윤두서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자신에게는 지극히 엄격했다고 한다. 그는 재물과 관련된 일에는 좀처럼 관여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이나 노복을 대할 때는 사랑과 위엄을 잃지 않아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 그를 좋아하고 따랐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는 당파를 뛰어넘어 이하곤을 비롯한 서인들과도 친분을 맺으며 예술적인 교류를 하였다. 이하곤은 윤두서의 풍모에 대해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긴 수염 길게 나부끼고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바라보는 자는 사냥꾼이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은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럼이 없구나”고 평했다.

‘윤두서 자화상’은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초상화로써 화면을 압도하는 인물의 외형과 내면이 조화롭게 표현돼 있어 한국 초상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조선시대 초상화가들은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표현으로 “터럭 한 올이라도 그 사람을 닮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다(一毫不似 便是他人)”고 해 그림을 실제와 아주 똑같이 그려내는 핍진(逼眞)에 아주 충실했다.

시대를 앞서 나간 윤두서도 그의 자화상에 표현된 극사실적 화법으로 무수히 그려진 수염은 한 올 한 올 그 굵기와 길이가 모두 다르다. 심지어 콧속의 털까지도 세밀하게 그려냈다. 심지어 눈 주위에 붉은 자국이 둥글게 둘러져 있는 안경 자국까지 구현해 냈다.

윤두서는 자신의 자화상에서 관직을 상징하는 탕건의 일부를 잘라버렸다. 이는 관직 제도에 대한 저항 즉 정치 구도에 대한 저항이다. 이는 서인 중심권력의 정쟁 속에서 남인의 저항을 보여주는 의미로 탕건을 잘라냈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탕건을 잘라낸 것은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얼굴을 화면 위쪽에 배치해 화면 전체를 더욱 중량감 있게 만들었다. 여기에 자신의 타고난 눈빛과 수염을 사실적이면서도 과장되게 표현하고, 얼굴 형태를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그려내 이미지 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윤두서 자화상을 보면 화면 전체에 흐르는 형태의 힘, 시대를 꿰뚫어 보는 강렬한 눈빛, 단호한 침묵의 무게 그리고 옹골찬 기개가 서려 있다.

윤두서에게 길을 물으며 민심의 향방을 진단해 본다. 국민의 선택 여하에 따라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옛말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충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