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환 충남대학교 회화과 명예교수, 한국화가
윤여환 충남대학교 회화과 명예교수, 한국화가

알베르트 카뮈는 1957년 노벨문학상 수락 연설을 하면서 초등학교 때 선생님 루이 제르맹에게 그 연설을 헌정했다. 빈민가에서 불우하게 자란 카뮈를 장학금 주선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시켜 오늘의 카뮈가 있게 한 선생님이 있었다. 이것이 참 스승의 역할이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스승의 은혜를 되새기기 위해 만든 날이 '스승의 날'이다. 여기서 '스승'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뜻만이 아니라 삶의 지혜까지도 가르치는 진정한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스승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옛 문헌을 보면 '무(巫)'를 '스승 무'라고 하여 '스승'이란 '여자 무당'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자 무당'은 고대 모계사회에서 대단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승은 원래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옛날에는 스님을 존경해서 부를 때 '사승(師僧)' 혹은 '사(師)님'이라는 호칭을 썼던 것이다.

조선초기 정교의 동언교략(東言巧略)에 보면 사(師)의 중국 발음이 '스'란 점으로 미루어 사승(師承)이 스승의 어원이라 했다. 이 '사승'이 변해서 '스승'이 되었고, '사(師)님'이 '스님'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스승은 스님을 높여 부르는 '사승(師僧)'에서 온 말이다.

고려 때에는 선생이란 말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었다. 조선조 중엽 때 문헌인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보면 당시 선비들이 술 마시며 글 짓는 문주회(文酒會)에서 벼슬이 높거나 낮건 간에 서로 '선생'이라 호칭을 불렀다. '비록 벼슬이 높은 귀인일지라도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그저 대인이라 부르는 것이 고려 때부터의 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스승의 날' 유래는 1958년 충남 강경여자중고등학교의 청소년적십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단원들은 병환 중에 계신 선생님 위문과 퇴직하신 스승님의 위로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63년 처음으로 5월 26일을 '은사의 날'로 정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다시 정하고 기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제지간의 공경과 존중심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오늘의 교육 현실을 지켜보며 교권과 인권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이는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에 따른 인성교육의 실종과 교권의 추락이 그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동안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 학생들의 교육권이 신장되어온 것에 비해 교권은 상대적으로 보호받지 못해 온 것이 사실이다. 교권이 바로 설 때 교육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교육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교권이 침해되면 교원의 자존감 상실과 스트레스로 양질의 교육활동이 어려워지고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가 침해되는 악순환으로 결국 전체 교육의 신뢰도가 하락한다.

좋은 사제지간은 사랑과 신뢰로 만나,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한다. 마르틴 부버는 진정한 인간화 교육이란 교사와 학생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실추된 교권의 회복을 위해 제도와 의식 개선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의 교사와 학생의 인격적 만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과 이해가 바탕이 되어 교육이 이루어 질 때 다시는 이 땅에 교사 폭행, 교권 실추라는 말은 없을 것이다. 

교권은 추락하고 학생의 인권만 존중되는 학교가 아닌, 교권과 학생의 인권이 함께 어우러져 화합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이번 스승의 날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교권 존중과 스승 공경 그리고 스승의 역할에 대해 깊게 성찰하여 무너진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정부 당국도 시대 흐름에 맞는 교육정책을 수립하여, 교권 침해를 줄여주고 교권 신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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