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사건추모공원 | 기억, 그 앞에 마주서다 -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추모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드론촬영(Drone shot 4k UHD Welcome-fly)
2025-04-27 이순규
- 촬영후기
4월 21일 월요일 오전, 감악산을 내려와 거창군 신원면 신차로 2924에 소재한 비극의 현장 거창사건추모공원을 찾았다. 온 산하가 희생자를 위로하는 듯 하늘과 땅 모두 고요하다. 이따금 주변 환경을 단장하고 정리하는 차량과 일손들의 소리만이 정적을 깨우는 것 같았다. 4월의 산하는 신록으로 가득차고 청명했지만 그 아래 잠든 희생자의 넋을 생각하니 가슴이 그저 먹먹할 따름이다. 어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런 참극이 있어야 했을까. 이것도 동족상잔이 부른 비극의 한 페이지일까. 국화가 가지런히 놓인 아무런 이름 없이 세워진 위령비 앞에서 잠시 추모의 시간을 가져본다. 묘비로 이동하여 빼곡히 잠든 희생자의 비문에 새겨진 이름을 바라보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남겨진 유가족에 대한 위로의 마음을 전할 뿐이었다.
- 거창사건 개요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 전쟁 기간에 패퇴한 인민군과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다. 당시 공비 토벌을 위해 특별히 창설된 국군 제11사단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11사단 9연대 국군 장병들은 거창군 일대에서 공산당과는 무관한 비무장의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1950년 12월 10일에 군인들은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증산 마을에서 정동해 3형제를 거동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사살했다. 또 1951년 1월 22일에는 북상 지서에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심문하여 인민군에게 밥을 해 준 마을 사람 여섯 명을 야산으로 끌고가서 사살했다.
한동석 소령이 지휘하는 3대대는 1951년 2월 5일 새벽에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정보 장교 이종대는 덕산리 내동 마을에서 주민 4명을 총살했다. 2월 9일 새벽에는 청연 마을에 들어와 집에 불을 지른 뒤 마을 앞 논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80여 명의 마을 주민이 학살을 당했다. 2월 10일에는 와룡리 방면 주민들을 면 소재지 방향으로 끌고오다가 탄량골에서 가격을 가해 100여 명을 학살했다. 2월 11일에는 신원 초등학교에 있던 마을 주민들을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서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 박산 골짜기에서 517명이 죽고 3명이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에 의해 학살된 주민들은 719명에 이른다.
이후 거창 지역 출신 국회 의원과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했을 때에도 군의 명예를 지키는 것에 급급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공비와 연결된 통비자로 몰고 갔다. 그러나 거창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진상을 덮으려고 한 군인들의 잘못이 일부 드러났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한국 전쟁 당시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장병들에 의해 집단으로 희생당한 양민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조성된 공원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