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시선]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날을 생각하며

2025-11-10     김윤석
                 박종용/前 대전둔산초등학교 교장

1936년 6월생이신 어머니께서는 2017년 9월 15일 밤 11시쯤에 병원 중환자실에서 운명하셨다. 식도암에 대상포진까지 겹쳐 고통을 많이 겪으셨다. 하늘나라에서 이제 그만 아프라고 모셔가신 듯했다.

향년 83세를 일기(一期)로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곁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그 시간에 17개 시-도 선생님들과 나라사랑 독도탐방 연수단원의 일원으로 울릉도에 있었다. 늦은 밤이라 움짝달싹할 수 없었다. 연수단장이신 대전교원단체총연합회 하헌선 회장님께서 위로해 주셨다.

이튿날 승선했지만 파도로 인해 출항 여부가 불투명했다. 시간이 흐르며 애가 탔다. 동생들과 통화하며 장례 준비를 했다. 출항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정시보다 1시간 정도 늦었지만 고마웠다.

그리고 6개월 후엔 아버지께서도 어머니 곁으로 떠나셨다. 홀로 무척 외로우셨나 보다. 폐암에 걸리셨지만 5년이 지나 완쾌하셨고, 매일 1~2시간씩 걸으시며 건강을 챙기셨기에 더 안타까웠다.

나는 그때에도 불효자였다. 2018년 3월 21일에 학부모총회와 체육대회 그리고 화정초 인조잔디 운동장과 급식실 준공식이 예정돼 있었다. 20일 밤에 선생님들과 최종 점검하다가 부모님을 모시던 남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텔레비전을 시청하시던 아버지께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고 했다.

그날 밤에 눈이 참 많이 내렸다. 3월 중순에 생각지도 못했던 눈보라까지 겹쳤다. 다행히 발인하는 날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개었다. 박근경 선생님이 고등학교 후배들과 관을 모시겠다고 나섰다. 고마웠다.

그렇게 부모님을 선산에 모셨다. 부모님의 묏자리는 평소 성묘하러 다니며 아버지랑 사전에 점찍어 뒀었다. 도로에서 50m 거리라 접근성도 좋고, 묘지에서 앞을 바라보면 4km까지 확 트여 답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부모 및 증조부모 묘지 바로 아래였다.

나는 묘지 상석과 비석에 부모님 성함과 돌아가신 날, 그리고 생신일까지 큼지막하게 새겼다. 자손의 이름도 적었다. 뿌리 없는 나무 없듯이,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담았다.

우리 집은 내가 국민학교 입학할 때만 해도 몇 명의 머슴을 두고 살 정도로 부잣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사업하러 서울로 떠나셨다. 나는 5남매 맏이로 어머니랑 논밭에서 살다시피 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친구들은 “너는 맨날 수업 끝나면 쇠꼴을 베거나 논밭에서 일만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어머니 혼자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고 싶었다.

부모님께 생전에 못해 드린 게 많지만, 그나마 몇 가지라도 잘했다며 위안 삼을 때가 있다. 법대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법대 진학을 원하셨지만, 2년제 교육대학에 진학했다. 동생들도 생각해야 했다. 동생 2명도 교육대학을 선택했다.

시골집 환경도 바꾸었다. 집 앞의 주택을 매입하여 텃밭을 조성했다. 부모님께서는 거실에 앉아 동네 마당과 노인회관을 훤히 내다보실 수 있다며 좋아하셨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담소 나눌 기회도 많아지셨다.

긴병에 효자 없다지만, 내 신용카드를 병원에 등록하여 가족들이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도록 했다. 나중에 동생들이 보태줬다. 암 치료를 위해 자주 입원하신 부모님 간병을 위해 아들과 딸, 어린 조카들까지 순번을 정해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허망하다. 생전에 좀 더 잘해드렸으면 하는 마음만 자리할 뿐이다. 이번 주 금요일엔 93세인 장모님을 뵈러 청주에 간다.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