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시선] 미소 띤 얼굴에 마음의 평화 한 스푼
김태진(57년생~ )
마음이 어지러울 때 그이를 보면 차분히 가라앉을 것 같다. 와글와글한 탐욕과 번잡한 계획의 도모가 아무 소용이 없어질 것 같다. 영혼의 담백함을 지닌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인간의 위대한 힘은 따뜻함에 있다고 느꼈다.
저는 경기도 광주 팔당댐 수몰 지역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에서 5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지요. 어렸을 때 밥 먹듯이! 밥을 굶고 간신히 살았다는 기억 뿐입니다. 초등학교 끝나자마자 부모님을 돕느라 밭으로 달려갔는데 규모가 적어도 일손은 한없이 필요했던 시절이었죠.
제 나이 15살 때 고향이 수몰되면서 친구들과 뿔뿔이 헤어졌지요.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꿈에서나 가끔 보일까, 제각기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고 있을 테지요. 저는 계속 모친을 모셨는데 이곳 영동으로 내려올 때 96세 모친은 고향 하남에서 혼자 계시고 싶어하셨어요. 전화로 문안 인사드리고 종종 찾아뵙고 있습니다.
종교는 가지지 않았는데 나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남한테 싫은 소리는 안 듣고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제 인생관은 그냥 남에게 피해 안 끼치고 사는 것. 지금껏 해왔듯이 아내와 서로 의지하면서 남을 돕고 사는 것입니다.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지요. 공사장에서도 일했고 우체국 집배원도 했고, 장사도 했었고, 자영업도 했고, 식당 일도 해봤습니다. 40세 넘어서 막내 동생 권유로 우체국 직원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오토바이 탈 줄 알기만 하면 면접만 보고 채용이 되었던 시절이었지요. 지금같이 직업을 못 구해서 힘들어하는 청춘들이 들으면 깜짝 놀라겠네요.
아파트가 막 생기기 시작할 때인 2000년도 당시는 주택이나 빌라가 많았어요. 하남시 전 지역을 돌아가면서 근무하는데 하루에 우편물을 3,000통 정도 배달했지요. “빨리 가져와라, 훼손이 됐네, 보상해라” 등등 민원인하고 이런저런 분쟁을 해결하는 일이 힘들다면 좀 힘들었지요.
커다란 개가 물려고 해서 다가오지 말라고 헛발질을 했는데 아주머니가 “집배원이 개를 때린다”고 우정청까지 민원을 넣었어요. 결국 개 한테 발길질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길로 나와버렸습니다. 국민연금은 20년을 채워야 하는데 15년 만에 퇴직해서 아쉽긴 하지요. 허허허.
늦은 나이에 제 아내를 소개로 만나 아이를 기다리지는 않았고요, 부부 둘이 사는 게 그저 원만하고 행복하네요.
앞으로의 소망은 부부 둘이 아프지 않고 동네 분들과 동화하면서 제가 법화리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기여해야지요. 마을에서 워낙 잘해주셔서 모든 면에서 다 수월합니다. 귀농·귀촌 지원금은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보려는 마음 때문이지요. 여태까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도왔지, 남의 도움을 바라거나 요행을 바라거나 꼼수를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곳 영동은 제2의 고향으로 지금 생각은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주어진 일과는 농사를 짓는 것이지요. 이장님을 통해 농지 370평을 구입했고요, 임대로 3000평 정도에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농사를 지면 마이너스라고 하지만 일단 저 혼자 감당하면 일당은 못 돼도 우리 먹을 것은 나옵니다. 남의 집 다니는 일은 전혀 안 하고 있지요. 건축은 막노동하면서 조금씩 배워둔 건데 시골살이에 아주 유용합니다.
농사일을 하다 보면 여름에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습니다. 장인 장모는 다 돌아가시고 처제 식구들을 일 년에 몇 번 만나는 정도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고향이 수몰되면서 깨복숭이 친구들과 헤어진 후로 친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 인생의 마디마디에서 만나는 사람이 다 친구라고 믿습니다. 금방은 아니지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다 보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을의 텃세는 없었고요, 젊은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지요. 무던하게 투명하게 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