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겨울이 오면- 고요속에 숨은 생명의 계절
겨울이 오면 세상은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람은 목소리를 낮추고, 나무는 긴 숨을 고른다.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지만,그 침묵 안에는 묘한 떨림이 있다. 얼어붙은 땅 밑에서조차 생명은 쉼 없이 봄을 준비하고 있다. 겨울은 끝이 아니라 기다림의 계절이다.
들판 위에 내린 서리가 아침 햇살에 녹을 때, 세상은 다시 빛을 배운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반짝이는 그 순간의 숨결은 마치 생명의 첫 고백 같다. 겨울의 얼음은 단단하지만, 그 위로 비치는 빛은 더욱 투명하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한 시간에도, 자연은 멈추지 않는다. 눈 아래의 땅은 조용히 숨 쉬고, 나무의 가지 끝에서는 이미 새싹이 꿈틀거린다.
겨울의 나무를 오래 바라본다. 잎을 모두 떨군 나무는 헐벗었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어떤 존엄이 느껴진다. 가지 끝마다 얼음이 맺혀도 나무는 하늘을 향해 선 자세를 잃지 않는다. 눈보라가 불어도 뿌리는 더 깊이 내려가고, 바람이 거세질수록몸통은 더 단단해진다. 어쩌면 자연은 그 혹독함 속에서 자신을 단련시키는 법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겨울은 자연의 정직한 얼굴을 드러내는 계절이다. 모든 것이 벗겨진 본래의 모습으로 서게 된다. 화려했던 잎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본질뿐이다. 사람의 마음도 이 계절을 닮았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본다. 무엇을 품고 살았는지,무엇을 놓아야 할지 겨울은 묵묵히 일러준다. 차가움 속에서야 따뜻함의 소중함을 깨닫고, 멈춤 속에서야 다시 걸을 힘을 얻는다.
눈 내리는 날의 정적은 언어보다 깊다. 하얀 눈송이가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올 때, 세상은 잠시 숨을 멈춘다.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난다.눈은 세상의 흠을 덮는 동시에 마음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감싼다. 하얀 풍경 속에서는 누구의 그림자도 크지 않다. 사람도, 나무도, 길가의 돌멩이도 모두 같은 빛으로 덮인다.
겨울 저녁, 눈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평화롭다. 해가 저물면 어둠이 세상을 감싸지만, 그 어둠은 두렵지 않다. 오히려 쉼을 선물한다. 겨울밤의 별빛은 차갑지만 또렷하다. 낮보다 오히려 밤이 더 밝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겨울이 오면 마음이 낮아진다. 높이 쌓으려 했던 욕심들이 눈처럼 내려앉고, 덜어내고비워내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것을 겨울은 묵묵히 보여준다.차가운 계절의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봄의 자리가 열린다.
겨울은 세상의 쉼표다. 그러나 쉼은 정지가 아니다. 바람이 멈춘 자리에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침묵 속에서 생명은 다음 장을 준비한다. 얼음 밑의 강물처럼, 보이지 않아도 흐름은 계속된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이 겨울을 지나 봄으로 이끈다.겨울이 오면 나는 가만히 걸음을 늦춘다. 세상이 멈출 때, 마음은 오히려 깨어난다.
찬바람 속에서 고개를 숙인 들꽃처럼, 겸손한 기다림이야말로 다음 계절을 여는 열쇠임을 안다. 겨울이 오면, 모든 것이 비로소 진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