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추세 역전 어려워졌다’... 기업 수익성·정화 기능 약화 ‘결정적’
구조적 수요부진, 투자 이력현상로 고착화 한계기업 퇴출 지연, 성장잠재력 제약
[충남일보 이승우 기자] 1990년대 이후 반복된 외환위기·글로벌 금융위기·팬데믹은 단순한 경기침체를 넘어 우리 경제의 성장 경로를 한 단계씩 낮추는 구조적 충격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대 석유파동 당시에는 성장률이 큰 폭으로 떨어진 뒤 다시 이전 추세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회복됐지만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팬데믹 이후에는 성장률이 위기 때마다 계단식으로 하락하며 추세 자체가 낮아지는 패턴을 보였다.
이 같은 성장추세 둔화의 배경에는 민간소비와 더불어 민간투자의 구조적 위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진단됐다.
거시 분석에서는 성장의 동인이 공급 측에서 수요 측으로 이동한 점이 먼저 확인됐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공급요인이 성장을 주도했으나 이후에는 수요요인이 성장 기여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특히 1990년대 이후의 주요 위기를 거치면서 민간 소비·투자의 위축이 성장추세 둔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이론은 장기 성장에는 공급충격이, 단기 경기변동에는 수요충격이 영향을 미친다고 보지만 이번 분석에서는 구조적 수요부진이 장기 성장경로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1인당 GDP 성장률을 구조적·일시적 수요·공급 요인으로 분해한 결과 구조적 수요요인의 성장 기여도는 외환위기 이전 5.4%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2.7%, 이후 0.3%까지 떨어졌고 최근 2년에는 -0.5%를 기록해 성장을 오히려 제약한 것으로 추정됐다.
반면 구조적 공급요인은 여성과 고령층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 등으로 일부 개선됐으나 수요부진을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다.
성장회계 분석에서도 위기 전후 성장률 둔화는 총요소생산성과 자본형성 기여도 감소가 대부분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나 투자 규모의 축소와 함께 투자 질의 저하 가능성까지 시사됐다.
아울러 반사실적 분석을 통해 경제위기가 구조적 수요부진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하면 투자와 GDP는 위기 이전 추세를 충분히 회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정적 수요충격 이후 투자 위축과 수요 둔화가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투자 이력현상이 발생했고 그 결과 성장세는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채 낮은 수준에 고착됐다는 평가다.
기업 단위 미시 분석에서는 투자 이력현상의 메커니즘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한국은행이 2000~2024년 외감기업 2200여 개를 대상으로 투자(유·무형자산 증가와 연구개발비)를 살펴본 결과 금융위기 이후 상위 0.1% 소수 대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기업에서 투자가 정체 또는 감소하는 양상이 확인됐다.
상위 0.1%의 투자는 위기 이전 추세를 유지하며 표본 전체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던 반면 상위 30%, 50%, 70% 등 나머지 구간의 투자 수준은 2011년 전후를 기점으로 횡보하거나 낮아졌다.
2011~2013년 평균과 2014~2019년 평균을 비교하면 전체 기업의 약 절반에서 투자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투자 둔화의 직접적인 원인을 보기 위해 투자율(투자/자산) 변화와 영업이익률, 부채비율, 유동성비율 변화를 함께 분석한 결과 투자율 변화는 영업이익률 변화와 가장 밀접한 상관성을 보였다.
금융위기 전후 영업이익률이 1%p 개선될 때 투자율은 0.07~0.09%p 높아지는 관계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나타났고 산업 특성, 자산규모, 매출 증가율을 통제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반면 부채비율과 유동성비율의 변화는 투자 변화와 뚜렷한 관계를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구조적 수요충격과 기업투자 결정요인의 연관성을 다시 살펴보면 부정적인 수요충격은 영업이익을 장기간 낮추고 미래 수익에 대한 비관적 기대를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투자 위축을 유도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수요충격이 발생하면 부채비율은 오히려 낮아지고 유동성비율은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 투자 여건 자체는 악화되지 않았으나 수익성 악화로 인해 ‘투자를 할 이유’가 줄어든 상황에 더 가깝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금융위기 이후 영업이익이 감소한 기업 집단은 증가한 집단에 비해 유형자산투자와 종업원 수에서 격차가 확대됐고 총수요에 대한 하방 압력을 키운 것으로 나타났다.
위기 이후 성장추세 둔화를 완화했어야 할 정화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외감·비외감 약 12만 개 기업의 패널 데이터를 활용해 업력 10년 이상 기업의 퇴출 여부와 재무 특성을 분석한 결과에서는 실제 퇴출 기업들은 퇴출 이전 수년간 산업 평균 대비 수익성과 재무건전성이 꾸준히 악화됐고 투자율 역시 크게 떨어지는 특징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영업이익률, 부채비율, 유동성비율, 이자보상배율, 유형자산증가율 등을 활용해 로짓 모형으로 퇴출확률을 추정한 결과에서도 2014~2019년 기준 퇴출 고위험기업 비중은 전체의 3.8% 수준으로 나타났다.
다만 같은 기간 실제 퇴출 기업 비중은 2.0%에 그쳐 수익성과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 상당수가 시장에 잔존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들 퇴출 고위험기업이 산업 내 평균 수준의 투자 여력을 갖춘 정상기업으로 원활히 대체됐다는 가정 아래 반사실적 효과를 계산하면 2014~2019년 기간 동안 국내 투자는 3.3%, GDP는 0.5% 추가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팬데믹 이후 2022~2024년의 경우에도 퇴출 고위험기업 비중은 3.8%로 비슷했으나 실제 퇴출기업 비중은 0.4%까지 떨어졌고 같은 방식으로 추산할 때 투자는 2.8%, GDP는 0.4% 더 늘어났을 여지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계기업의 잔존이 자본과 인력을 저생산성 부문에 묶어 두면서 신생·고부가 기업의 진입과 성장 기회를 제약하고, 나아가 전체 생산성·투자·소득·소비의 선순환을 가로막았다는 의미다.
결국 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성장추세 둔화는 부정적인 구조적 수요충격이 기업 수익성 악화를 통해 투자와 생산성 향상을 제약한 가운데, 한계기업의 퇴출과 신규기업 진입이라는 정화 메커니즘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한 결과로 요약된다.
경제계 한 전문가는 “위기 때마다 일괄적인 금융지원과 연명 위주의 지원으로 한계기업을 시장에 붙잡아 두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성장추세를 더 낮추는 처방이 될 수 있다”며 “유동성 측면에서 일시적 어려움을 겪는 기업과 혁신적인 초기 기업에는 선별적·보조적으로 금융을 지원하되 수익성이 구조적으로 낮은 기업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퇴출되도록 하고 동시에 반도체·자동차 같은 주력 산업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는 한편 규제 완화를 통해 신산업에 대한 투자와 진입을 촉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방향으로 기업 역동성과 정화 메커니즘을 복원하지 못하면 투자 이력현상과 성장 추세 둔화는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