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원대 뉴노멀’ 현실화... 충청권 기업, 환율 쇼크 직격탄
실질실효환율 16년2개월 만에 최저 충청권 제조·수출 구조 전반 비용 압박 확대
[충남일보 이승우 기자] 원화 가치 하락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대전·세종·충남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과 원가 구조를 동시에 흔드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올해 10월 말 기준 89.09(2020년=100)로 집계됐다.
이는 전월 대비 1.44p 낮아진 수치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 8월 88.88을 기록한 이후 16년2개월 만의 최저 수준이다.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극대화됐던 올해 3월 89.29보다도 더 낮다.
실질실효환율은 자국 통화가 교역 상대국 통화 대비 실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갖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기준값 100보다 낮으면 실질적으로 통화 가치가 저평가된 것으로 본다. 현재 수준은 원화의 실질 구매력이 주요 교역국 통화에 비해 눈에 띄게 떨어져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지난달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수준은 BIS 통계에 포함된 64개국 가운데 일본,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낮았고, 한 달 동안 하락 폭도 뉴질랜드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명목 환율 흐름도 이를 뒷받침한다. 최근 원-달러 환율은 지난 21일 주간 거래에서 장중 1476.0원까지 치솟은 데 이어 24일 13시 기준으로도 1476.50원을 기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 중앙은행의 추가 매파적 기조와 일본의 확장 재정 정책 등 대외 요인이 겹칠 경우 1500원선 진입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본다.
실제로 내년 원-달러 환율 상단을 1540원, 하단을 1410원으로 제시하며 1400원대를 ‘뉴노멀’로 제기했다.
이 같은 고환율 환경 속에서 충청권 기업들은 수출 지표 개선과 비용 부담 확대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중 구조에 직면해 있다.
우선 충남은 메모리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산기록매체, 석유화학, 정유 등을 중심으로 전국 상위권 수출 실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2024년 기준 대전·세종·충남 전체 수출액의 약 90% 이상을 담당하는 핵심 수출 거점이다.
특히 충남의 주력 품목인 집적회로 반도체는 2분기 수출액이 109억5600만 달러로 전체 수출의 56.3%를 차지한다.
달러 표시 매출 비중이 높은 만큼 원화 약세가 단기적으로는 수출 단가와 원화 환산 매출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준다.
최근 대미 반도체 관세 논의가 부각되는 상황에서 고환율이 일부 가격 경쟁력을 보완해주면서 급격한 충격은 피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다만 이러한 수출 효과와 별개로 생산비 측면에서의 부담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정유·석유화학처럼 에너지와 원재료 수입 비중이 높은 업종은 고환율로 수출 단가가 오르는 동시에 달러로 결제하는 원유·원재료 및 장비 도입 비용이 함께 올라가는 구조다.
대기업의 경우 일정 부분 가격 전가 여력이 있지만 공급망에 편입된 중소 협력업체는 납품단가 인상 여지가 제한돼 환율 부담이 이익 축소로 직결될 수 있다.
고환율이 지역 수출액과 무역수지 통계를 개선하는 동시에 실제 생산비 구조를 왜곡하는 양면성을 보이는 셈이다.
대전과 세종은 수출 규모는 충남보다 작지만 산업 구조상 환율 변화에 더욱 민감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두 지역에는 우주·항공, 첨단 장비, 화장품, 의료·헬스케어 등 고부가가치 소비재와 기술집약 제품 비중이 높은 기업들이 분포해 있다.
이들 업종은 완제품 마진은 높은 편이지만 핵심 부품과 소재를 해외에서 들여오는 비율이 높아 고환율 시 원가 상승 압력이 빠르게 반영된다.
또한 대전·세종·충남 전역에는 완성품 수출 대기업뿐 아니라 수출과 수입을 동시에 수행하는 중소기업이 다수 존재한다.
중소기업은 일반적으로 환헤지 전략과 재무 쿠션이 충분하지 않아 환율 급등기에 원자재·부품 수입 비용이 단기간에 불어나기 쉽다.
동시에 글로벌 완성차·전자 업체로부터 납품단가 인하 요구를 받거나 물류비 상승까지 겹칠 경우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할 여지도 크다.
원화 약세가 구조화되는 배경에는 대외 변수 외에도 국내 자본 흐름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위험 회피 심리가 강화되면서 달러 선호가 높아진 가운데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투자 확대가 겹치며 달러 매수 수요가 원화 약세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진단이다. 물가 상승률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점도 실질실효환율을 더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달러 강세가 완화되더라도 원-달러 환율이 과거처럼 1300원 안팎으로 되돌아가기보다는 1400원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는 충청권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고 에너지·원재료 수입 비중도 큰 지역 경제에는 장기간 이어질 수 있는 위험 요인이다.
아울러 고환율 국면을 단기 변동으로 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지역 연구기관 힌 관계자는 “최근 환율 흐름은 일시적 급등이 아니라 구조적 요인과 결합한 장기 국면에 가까워 보인다”며 “기업들이 환헤지와 비용 구조 조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응 역량을 갖춘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간 간극이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이 경우 대전·세종·충남 기업들 사이에서도 수익성과 투자 여력의 양극화가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