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계탕은 이름 석 자에서 알 수 있듯이 인삼과 닭의 컬래버레이션이다. 무더운 삼복 기간 여름 보양식의 대명사인 삼계탕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삼계탕이 고려나 조선시대부터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복날에 삼계탕을 먹는 문화는 1960년대 이후에 정착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인식이 생겼을까? 조선시대에서 복날에 서민들은 주로 개고기를 넣은 개장국(보신탕)을 즐겨 먹었고, 양반들은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은 육개장을 즐겨 먹었다.
삼계탕의 원형으로 보는 닭백숙은 조선시대에서도 이미 존재했다. 특히 고기가 귀했던 시절 그나마 흔한 닭고기를 이용한 요리의 하나였다. 단, 조선시대 몇 안 되는 요리책에는 삼계탕이란 음식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삼은 가공 방식에 따라 크게 수삼(水蔘)과 백삼(白蔘), 홍삼(紅蔘)으로 나뉜다. 수삼은 말리지 많은 인삼으로 물기가 사라지면 썩는다. 때문에 인삼밭에서 캐낸 수삼은 보통 10°C 정도에서 10일밖에 보관할 수 없다. 그러니 인삼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서는 백삼이나 홍삼으로 가공해야 한다. 백삼은 보통 4년 동안 재배한 수삼의 껍질을 벗겨낸 다음 햇볕에 말려 만든다.
홍삼은 보통 6년 동안 재배한 수삼을 쓴다. 삼을 깨끗하게 씻어 수증기로 쪄낸 것을 뜨거운 바람에 말린 후, 수분이 12.5~13.5% 정도 남도록 햇볕에 말려서 만든다. 홍삼은 인삼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서 개발된 결과물이다.
백삼은 고려 시대 이래 중국과 일본에 수출했던 명산품이었다. 하지만 홍삼은 1810년경에야 홍삼을 가공하는 증포소(蒸包所)가 개성에 설치됐을 정도로 늦게 개발된 가공법이다.

삼계탕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몇몇 부잣집에서 닭백숙이나 닭국에 백삼 가루를 넣어 만들면서 시작됐다. 인삼이 귀하던 시절엔 그저 부자들이나 맛볼 수 있는 약선(藥膳) 음식으로 여겨졌다. 1924년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중추원에서 조사한 ‘조선인의 생활 풍속’를 살펴보면, “조선의 부잣집에서 여름철 암탉의 배에 인삼을 넣어 우려낸 국물로 약을 하는 사례가 많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1940년대 후반부터 이를 식당에 파는 경우가 늘어났고, 1950년대 전후로 ‘계삼탕’이라는 별개의 요리로 정착됐다. 1960년대 이후 삼계탕에 백삼 대신 수삼을 넣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냉장고가 보편화되면서 수삼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삼 생산과 유통으로 유명한 충청남도 금산은 6.25전쟁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남한의 대표적인 인삼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1960년을 전후해 금산읍의 금성교 근처에 20여 호의 수삼 판매점이 있었다고 한다. 1966년이 되면 금산시장에 수삼만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상점이 자리를 잡았고, 1973년에는 아예 우시장이 서는 자리에 수삼시장이 들어섰다. 1960년대 이후 수삼의 보급이 원활해지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백숙을 팔던 식당들이 이름을 삼계탕으로 바꿔 팔기 시작했다.
결국 건국 이후 줄기차게 진행된 국가의 양계업 진흥과 인삼 재배 확산이 1960년대 들어 삼계탕을 전문 식당에서 판매되는 음식으로 만든 배경이 됐다. 길지 않은 삼계탕의 역사, 삼계탕은 금수저들의 음식에서 진정 국가대표 서민음식으로 자리매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