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일보 조서정 기자] 2004년에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한 송진권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원근법 배우는 시간』을 창비에서 출간했다.

총 57편의 시가 수록된 시집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시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 자연과 문명으로 분화되기 이전에 경험한 시원 (始原)의 시간들을 호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시인이 문명속에 내 던져지기 이전에 경험한 정서적 결핍이 없었던 유년의 기억들이다.

천상병시문학상 심사평에서 "우리 시대 백석 시인의 현현(顯現)"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송진권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 「거기에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보다 한층 더 확장된 시 세계를 보여준다.

장대를 든 아이가 담장을 긁으며 걸어가요

또다른 아이도 집을 뒤져 장대를 찾아 들고 따라가요

장대 끝을 둥글게 휘어 거미줄 잔뜩 걷어 붙이고요

까치발 하고 몸을 길게 늘였어요

 

오늘 하늘은 푸르기만 해서요

구름 한 점 없어요

매미 소리만 우렁차게 들려요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이렇게 기다란 장대를 높이 들고 가면

장대 끝에 우리를 데려갈 새가 날아와 앉는데요

 

장대를 높이 든 아이들은

키 작은 아이들이 따라가요

미루나무 길을 따라

마을 밖으로

도랑을 따라 강이 보이는 데까지

-「장대들고 따라와」 전문

시집 맨 첫 장에 실린 「장대들고 따라와」2연에 제시된 아이들이 걸어가는 시간과 공간은 푸른 하늘과 구름 한 점 없는 그런 맑은 날에 매미소리만 우렁차다. 푸른 하늘과 구름 한 점 없는 맑다는 것은 문명 진입 이전의 하얀 도화지 같은 세계인 동시에 매미소리만 우렁찬 자연의 시간이다.

그래서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기다란 장대를 높이 들고 가면/장대 끝에 우리를 데려갈 새가 날아와 앉는데요”라는 진술을 통해 시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암시한다. 이 세계는 무위자연의 세계로 자연에 순응하던 사람들이 살았던 시간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태초에 아무런 정서적 결핍이 없었던 시원의 시간에 합류하게 된다.

기웃이 분꽃을 들여다보며

별자리마다 웅크린 이들까지도 들여다보면서

어릴 적 읽은 이야기책에서

꽃이 되고 별이 된 이들의 내력을 기억해내고는

- 「누구여」 부분

시적 화자가 옛 사람들을 만나는 매개체는 분꽃으로 상징되는 자연이다. 분꽃 속에서 꽃이 되고 별이 된 이들의 내력을 기억해 낸다는 대목에서 이번 시집은 자연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암시를 엿볼 수 있다. 

쇠뿔에 고삐 감아 산에다 풀어놓고 나는 골짜기 돌이나 뒤지며 가재나 잡던 것이었는데요 그때쯤이면 앞뒷산 능선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옴팡골 밖으로 풀어져나가는 것이었는데 워낭 소리가 희미해지다가 드디어 가뭇없어지는 때쯤에서 나는 소를 찾아 나서는 것인데요 잡았던 가재 도로 물에다 풀어놓고 주근깨 송송 박힌 산나리꽃을 쥐어뜯으며 네미 네미 소를 불렀던 것인데요 어둑밭 내리는 산골짜기를 허위허위 오르노라니 소는 어디로 갔는지 당최 코빼기도 볼 수 없던 것인데요 희미하니 들리는 워낭 소리를 따라 껑충한 원추리꽃 분지르며 넘어갔을 적엔 퍽이나 커다란 산초나무를 만났던 것인데요 웬 놈의 호랑나비떼가 산초나무에 그리 빼곡하니 앉았는지 더러는 훨훨 날아다니는 놈도 있고 더러는 앉아서 교접하기도 하며 산초나무가 이룬 한세상 꽃밭에다 죄다 입을 박고 꿀을 빠는 것인데 하 그런 장관이 없어서요 나는 소를 찾을 걱정도 다 잊어버리고 신령한 뭔가를 보듯 황홀하게 산초나무를 우러르며 주저앉았던 것었는데요.

- 「내가 처음 본 아름다움」 전문

이처럼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던 때에는 세상 걱정 다 내려놓고 꿀이나 빨면서 살 수 있었기에 모든 것들이 신비로움 그 자체였고 아름다움이었다. 속도에 치여 무한 경쟁에 내 던져지기 이전에 경험했던 자연의 시간들은 시에서 신령하고 황홀했던 세계로 묘사된다.

성새미네 할머니 돌아가시고

끼니때마다 된밥 한그릇씩 꼬약꼬약 고봉으로 드셨다는데

사흘 만에 우리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동네 뭣 좀 아는 사람들 말로는

우리 할머니랑 동무해서 저승길 하냥 가자고

성새미네 할머니가 데려가셨다는데

어이 거기 수리실 언니 아녀

그랴그랴 돌목댁아

밤참으로 고구마나 좀 싸서

가린여울에 올뱅이나 잡으러 가듯

두분이 가셨을 거라 생각해보았다

가다가 다리 아프면

삼정골 정자나무 아래서 좀 쉬었다가

손주 데리고 나온 한말댁 나물 다듬는 거 참견이나 하시다가

아이고 정신머리야 싸기싸기 가봐야지

올뱅이 잡으러 간다고 나와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 하듯이

언니 난 이만큼배끼 못 잡았네

그랴 내가 많이 잡으면 너 덜어주고

니가 많이 잡으면 나 좀 덜어주고

올뱅이 잘그락대는 바구니를 이고

이마로 흐르는 물을 닦아내며

잘그락잘그락 올뱅이끼리 부딪는 소릴 내며

두분이 함께 가셨을 거라고 생각해보았다

-「올뱅이 잡으러 가듯」 전문

송진권 시인의 시에 드러난 시원의 세계는 다시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세계로 확장된다. 그래서 죽음조차도 올뱅이 잡으러가 가듯이 친구랑 같이 정답게 손잡고 가다가 “정자나무에서 좀 쉬었다” 가고 손주 데리고 나온 “한말댁 나물 다듬는 거 참견”이나 하면서 “올뱅이 잡으러 간다고 나와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 하듯이 편안한 저승길로 묘사된다.

할머니 따라 소쿠리 쓰고

텃밭에 갔을 때

똥 마려워

밭고랑에 땅 파고 똥 눌 때

괭이밥이며 개밥두더지

노린제 노낙각시 불개미 새끼지네 들이

다 내 밑을 봤다고 중뿔나게 소문을 내고 다녔을 거고

똥이 시커멓더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거고

칡넝쿨 번지듯 삼동네에 다 소문은 났을 거고

똥 위에 소문처럼

쇠파리 똥파리 금파리 초파리 말파리 파리란 파리는 다 날아들었을 거고

할머니 뽕잎 따다 밑 닦아주었을 거고

밑이 위로 가게 하고

바라본 할머니가

달이산만큼이나 크기도 했을 고

똥 위에 하얗게 배긴 오디 씨앗들의

훌륭한 매개였던 내 몸이 기특해서

똥도 이쁘게 싸놓았네 내 새끼, 하셨을 거고

밭둑의 뽕나무도 이파리 뒤채며 아유 내새끼들, 했을 것인데

오늘 어린 딸의 밑을 닦아주며

밑이 위로 갔던 세상을 생각해보고

참외씨 배긴 똥이 예쁘다는 생각도 해 보고

참외씨와 오디씨가

낄낄대며 깔깔대며

우리랑 어떻게 어울려 살았는지 생각도 해 보네

-「밑이 위로 갔던 때」 전문

「밑이 위로 갔던 때」에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본래 자연의 시간에 따라 서로 어울려가며 순환하는 시간 속에 있었다. 그래서 시작과 끝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맞물려 도는 순환적 시간관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말하는 순환적 시간은 우주 질서로 표명되는 시간과 인간 삶의 질서로 표명되는 시간이 각각의 리듬에 따라 순환하는 과정이다.

내가 길 잘 든 순한 짐승 같은 붓도랑을 데리고

거뭉가니 들판을 가면

물 가둔 논마다 월인천강 월인천강

달이 들어앉아서 몸을 부풀리며 숨을 몰아쉬기도 하다

뽀드득 낯을 씻어내는 거뭉가니 들판을 가면

내가 쫑알쫑알 지껄이는 딸내미 같은 붓도랑물 데리고

논둑에 선 조팝꽃이며 자잘한 꽃다지 냉이며 개불알꽃

하다못해 벌금다지며 머위까지

목숨 있는 것이라곤

모두 북 치고 소고 들고 상모 돌리며 꽃 피운

거뭉가니 들판을 가면

내가 물살 물굽이 물비늘 소용돌이까지 다 거느리고

참개구리며 물방개며 밀뱀 장구애비까지 거느린 붓도랑물 데리고

거뭉가니 들판을 가면

매어놓은 염소도 몽롱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니가 저 아래 동실집 쫑마리 아녀? 물어보기도 하는

거뭉가니 들판을 가면

풍덩, 무엇이 물로 뛰어드는 소리에 돌아본

물 댄 논마다 하나하나 들어찬 달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들이 노래를 부르는

물꼬를 타놓아 철철철철 넘실대는 월인천강을 가면

-「나의 월인천강지곡」 전문

월인천강(月印千江)은 ‘하나의 달이 모든 강에 비친다’는 뜻으로 하늘에 떠있는 달은 우주에 하나 뿐인 달이지만 물에는 천개의 달이 비친다는 뜻이다. 송진권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달은 붓도랑이 끌고 가는 거뭉가니 들판에서 시작해서 "논둑에 선 조팝꽃이며 자잘한 꽃다지 냉이며 개불알꽃 하다못해 벌금다지며 머위까지 목숨 있는 것이라곤 모두 북 치고 소고 들고 상모 돌리며 꽃 피운 거뭉가니 들판을 가“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시속에 등장하는 조팝꽃 꽃다지 냉이 개불알꽃 벌금다지 머위까지 모두 들판이 키운 작물들이다. 그런데 이 작물들이 달빛을 따라 북 치고 소고 들고 상모 돌리는 거뭉가니 들판은 바로 시인이 태어난 시원의 자리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뭇 생명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우주적 리듬에 합류하는 원형의 세계를 그려낸다.

「나의 월인천강지곡」에 드러나는 세계는 자기가 태어나고 살아온 삶 속에서 우주의 리듬을 발견해 내는 동시에 지금 내 앞에 있는 달의 느낌에 집중하고 있는 나의 이야기다. 이 시에는 시인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울물 흘러가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의 흐름 속에 우주적인 리듬과 깊이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마치 우주 질서의 시침과 인간 삶의 분침이 각각 제 시간을 향해 순환하는 과정에서 나를 찾아가는 주체 찾기로 제시된다. 시인은 그 주체 찾기를 위해 충청도 사투리의 능청스러운 가락과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서정적 비유를 아낌없이 동원한다.

송진권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정말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시간에 쫓기면 살아내는 동안 무엇을 잃고 왔는지 그리고 진정 행복했던 순간들이 언제였는지 넌지시 물어온다.

송진권 시인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2004년 창비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자라는 돌』, 『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 외 동시집 『새 그리는 방법』, 『어떤 것』이 있다. 천상병시문학상과 고양행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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