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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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체가 다르되 이미 타자가 아니다."

이 심오한 문구는 철학과 소논문 속 명제가 아니다. 엄정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젊은 날 아내에게 보낸 프러포즈 편지에 담은 한 구절이다.

이 책은 이처럼 매사 진지하면서도 엉뚱한 철학자 엄 교수를 가까이서 지켜본 가족들이 다시 펴낸 에세이다.

엄 명예교수의 아내이자 '정혜', ' 당진 김씨' 등을 쓴 소설가 우애령 작가가 남편을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했다. 딸이자 인스타툰 '펀자이씨툰'의 엄유진 작가가 2007년 출간된 에세이에 삽화를 추가하면서 이번에 개정증보판으로 재탄생했다.

에세이 속 엄 명예교수는 유쾌한 사색가다.

가엾다며 새끼 오리 세 마리를 무턱대고 사와 집안에 풀어놓거나, 미국 유학 시절 거리의 여자가 차에 올라타자 갈 곳 없는 사람 같다며 아내에게 집에서 재워도 되는지 물어보는 일화들 속에서 그의 편견 없는 시각이 엿보인다.

운전면허 색약 검사에서 "68이냐, 아니냐"는 단정적인 질문에는 끝내 답하지 않고 "68 같다"고만 하다 색약 의심 판정을 받게 된 이야기에서는 하늘 아래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철학가만의 신념이 돋보이기도 한다.

집안에 철학자가 하나 있다면, 필연적으로 실무자도 존재한다.

우 작가가 바로 그렇다. 여전히 펜으로 원고를 쓰는 남편을 위해 컴퓨터로 이를 쳐서 이메일로 보내주고, 남편이 생명 존중을 핑계 삼아 집에 들여오는 온갖 물건을 막아내는 수문장 역할도 한다.

본인을 소크라테스의 악처 크산티페에 종종 빗대지만, 누구보다 명쾌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철학자의 아내들을 위한 학설이 틀림없다"는 푸념이나 술자리에서 먼저 가는 사람을 가리자는 남편과 동료 학자의 내기를 두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가기는 어딜 간다는 말인가"라고 일갈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탁구공처럼 빠르고 재기발랄하게 오가는 부부의 대화를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이것이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에피소드마다 엄유진 작가의 짧은 만화가 삽입됐다.

16만명이 보는 인스타툰 '펀자이씨툰'에서 보여주던 따뜻하면서도 소탈한 가족의 모습이 연필 질감의 그림에 담겼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엄 교수가 딸에게 보낸 편지 여럿과 '책 속의 작은 책'이라는 이름으로 '오리와 철학자'라는 단편 만화도 함께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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