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일보 조서정 기자] 2013년 시와경계로 등단한 이호준 시인이 첫 시집 『티그리스 강에는 샤가 산다』 에 이어 6년만에 두 번째 시집 『사는 거, 그깟』을 도서출판 북인에서 출간했다.

이호준 시인의 이번 시집은 그간의 삶의 여정에서 길어 올린 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불교적 사유가 짙게 녹아 있다. 서정성과 진정성 그리고 깊이와 넓이를 한데 아우르는 것이 이번 시집 『사는거, 그깟』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호준 시인은 최근 몇년 동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생철학적 면모를 실천해왔다. 한 예로 최근 몇년 간 작은 절에 들어가 불목하니 생활을 자처하면서 수행자의 삶을 살아왔다. 현재는 다시 세상으로 내려왔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수행자의 삶과 닮아 있다.

생철학은 체험을 통해 모든 것을 파악하려고 한 철학의 한 부류이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났는데, 독일 관념론의 합리주의나 과학주의적인 기계론에 반대하고 의지나 직관을 중요하게 여겼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 등이 생철학을 주장했다. 이번 이호준 시인의 시에는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삶에서 겪은 다양한 삶의 깨달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번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시인 자신의 소시민적 삶이 진하게 녹아 있는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2부는 세상과 소통하는 시인의 깨달음이 담긴 시들이 주를 이룬다. 3부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방식과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사유가 녹아있다.  4부는 연기緣起, 염화미소, 굴참경을 읽다, 자비심의 실체, 자선 보일러, 텅 빌수록 가득한 등으로 채워져 있다. 4부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적 사유가 더 직접적으로 짙게 녹아 있다.

 

길가 편의점 문을 민다

사리곰탕 큰사발면 포장을 벗긴다

스프를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천천히 전화 버튼을 누른다

숨을 크게 몰아쉰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아침도 고깃국 먹고 있는 걸요

목소리에 짐짓 윤기를 칠하며

후루룩 국물부터 마신다

-「떠돌이의 생일」전문

 

이 시에 나오는 떠돌이의 삶은 바로 수행자의 삶이다. 아무리 떠돌아다니는 삶이라 해도 인연으로 얽힌 부모님에 대한 자식의 도리마저 저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편의점에서 산 사리곰탕 큰 사발면 포장을 벗기면서 아들을 걱정하실 노모를 위해 “오늘 아침도 고깃국 먹고 있는 걸요”라고 말한다. 떠돌아 다니는 삶이지만 노모에게만은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효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혼자 찾아와 숙박하겠다는 여자는 불안하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우물가에서 노는 아이 보듯 살펴야 한다

두 번째 인생쯤 사는 얼굴로 술 한잔하자고 청하면

마누라 금가락지 훔쳐 노름방 다녀온 사내처럼

엉거주춤 앉을 수밖에 없다

서너 잔 마신 술을 못 이겨 남편 새끼, 나쁜 새끼

험한 말이라도 나오면 그때부터 안심이다

그런 여자에게는 욕설도 희망이라 사고를 치지 않는다

당신 같은 사람과 하루만 살면 원이 없겠다고

눈 반짝이면 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밤에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내 뒤척인다

눈 어두운 여자 또 하나 속였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죄 많은 가장

떠돌다 떠돌다 세상의 끝에 틀어박힌 남자

내 아내도 지금쯤 어느 술집 불빛 흐린 구석에 앉아

남편 새끼, 나쁜 새끼 되뇔지 모르는데

나는 여기서 저무는 생 술잔에 구겨놓고 있다

-「남편 새끼, 나쁜 새끼」-민박집 남자로 살아가기, 전문

 

세상을 따뜻하게 보듬는 마음과 너무 정직한 시인의 마음이 유머러스하게 버무려진 시다. 그러면서도 집에 두고 온 아내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내가 그때, 잃어버린 마음 찾겠다고 떠돌 때

북극 가까운 어느 작은 도시에

카드 한 장 건네주며 남겨두고 온 나는

여전히 이곳저곳 유랑하는 모양이다

늦은 설거지하다 문자 한 통 받았다

알프스 어디쯤에서 69만5,000원이나 긁었단다

헤어질 땐 소심하기 짝이 없더니

긴 여행이 간을 많이 키운 게 틀림없다

설거지 마치고 모처럼 내게 편지를 쓴다

먼 나라를 떠도는 또 하나의 나여

오늘은 어디서 한 끼를 구하고 있는지

환절기라 웃이라도 한 벌 사 입었는지

(그래도 69만5,000원은 너무했다)

훈자 마을의 사과꽃 소식은 아직 멀었지?

우유니 사막의 소금은 여전히 밤마다 잘 자라고?

그랜드 바자르의 알리 씨는 잘 있나 몰라

이곳의 나날은 여전히 박제 중이라네

피싱 문자라도 안 오면 무료해 죽었을 거야

끝내 여행자로 살아 있게 먼 곳의 나여

-「피싱 문자」 전문

참 재미있는 시다. 보이스피싱 때문에 세상에 대한 신뢰가 자꾸만 무너져 가는 사회에 살면서도 이토록 세상을 재미있게 풍자해 내는 시인의 마음자리에 우주가 가득 들어차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전화기 이쪽, 뼈까지 시린 남자가

전화 저쪽에서 눈처럼 어둠 적시는 여자에게

집을 팔자고 말한다

30년 일해서 유일하게 남은 재산이라고

나와 내가 이생에 세운 단 하나의 깃발이라고

집이란 말도 못 꺼내게 하던 남자가

집을 팔아치우자고 사랑 고백하듯 속삭인다

살얼음 위를 뒤꿈치 들고 걷는 것도 못할 짓이라고

쫓겨서 가지 말고 웃으며 떠나자고

눈송이처럼 가벼워진 목소리로 만한다

여기저기 빚을 끄고도 얼마간은 남지 않겠느냐고

좀 멀리 가면 몸 뉠 곳 하나 못 구하겠느냐고

아이들에게도 조금씩 떼어주자고

빈손으로 시작해 팔 집이라도 남겼으니 다행 아니냐고

어깨라도 두드려줄 듯 나직나직 말한다

곤궁도 살아 있으니 겪는 것,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 않더냐고

아끼던 농담까지 늘어놓는다

하루 두 끼 굶어도 빚 같은 거 절대 지지 말자고

남은 날들 못 만난 듯 지우다 가자고

더는 가난 때문에 가난하게 울지 말자고

오늘 아침 새로 돋아난 섬이라도 발견한 어부처럼

너덜거리는 가슴 성글게 기우며 웃는다

별들도 일찌감치 아랫목 파고드는 성탄 전야였다

-「성탄 전야」 전문

이 시는 평생을 열심히 일해서 겨우 마련한 집 한 채마저 팔아야 하는 도시 변두리 소시민의 삶의 애환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진정성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모두가 행복해하는 '성탄 전야'라는 설정은 이런 소시민의 삶의 애환을 더 슬프게 확장한다. 그럼에도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슬픔을 슬픔으로 버무리지 않고 유머와 해학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이호준 시인의 생철학적 면모가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나와 함께 사는 개는 일찌감치 귀가 열려서

어지간한 말은 다 알아듣는데

마음 내키지 않으면 듣고도 못 들은 척하기 일쑤

밥 먹자, 하면 먼산바라기나 하다가

내가 안 보일 때 우연히 발견한 척 먹는다든가

산책 가자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목끈 물고 앞장서는 것이어서

대체 안에 뭐가 들어앉았는지 궁금한데

열린 귀와 눈은 쓰는 데가 따로 있어서

남쪽에서 올라온 바람 앞에 앉혀놓고

섬진강 첫 매화 핀 소식을 꼬치꼬치 묻는다든가

보름달이 중천쯤 지나는 밤이면

계수나무니 옥토끼니 안부 묻느라 수다스럽고

뜬 건지 감은 건지 모호한 눈으로

천 리 밖 내다보며 날씨를 점쳐보기도 하는데

어쩌다 온 손님들 소주잔 앞에 놓고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느니 없느니 중구난방일 땐

석가세존 꽃을 꺾어 들기도 전에

슬그머니 돌아앉아 혼자 웃기도 하는데

-「염화미소」 전문

염화미소라는 시에서 보듯이 이호준 시인의 시에 드러나는 불교적 사유는 시장 좌판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우면서도 재미있게 쓰여졌다는 점에서 기존에 발표된 불교적 사유의 시들과 구별되는 탁월함이 숨어 있다.

 

늦장마 그친 이른 아침

두 해 전 죽은 참나무

잔나비걸상버섯 품에 안고 젖 물리고 있다

별빛이 흐려질수록

죽어도 차마 죽지 못하는 것들이

숨 더운 것들을 보듬는다

-「자비심의 실체」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에는 깨달음과 공존이라는 화두가 녹아 있다. 지구에 불어닥친 기후 위기라는 시급한 현안 앞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흔적들이 「자선 보일러」, 「꽃은 새가 물어온다」, 「이웃」 등과 같은 여러 시편에서 발견된다.

이번 시집은 시가 품고 있는 뜻과 깊이는 깊고 넓지만 그 표현 방법은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간명하다. 이런 측면에서 진정성에 기반한 쉽고 간명하게 다가오는 좋은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설 명절을 보내면서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는 길목에서 이호준 시인의 『사는거, 그깟』을 펼쳐 읽으면 버드나무에 물오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호준 시인은 서울신문 국장 출신이다. 신문사 퇴직 후에는 전문 여행작가 등으로 활동하면서 활발한 필력을 펼쳐왔다. 그래서 등단 이전에 이미 산문 작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동안 다양한 산문에서 보여준 그의 필력은 한겨울 독자들의 가슴에 화롯불을 지펴놓은 것처럼 포근하게 스며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호준 시인은 시집으로 『티그리스강에는 샤가 산다』, 산문집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1,2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부』,『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기행산문집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문명의 고향 티그리스강을 걷다』,『나를 치유하는 여행』,『세상의 끝, 오로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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