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애통한 일일세! 내 일찍이 친구를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슬픔보다 훨씬 크다고 말한 적이 있었네. 아내를 잃은 자는 두 번, 세 번 재혼할 수도 있고 첩을 얻는다 해도 안 될 것이 없네. 마치 솔기가 터지고 옷이 찢어지면 깁거나 꿰매면 되고, 기물이 깨지거나 이지러지면 새것으로 바꾸면 되는 것과 같은 걸 테지. 그러나 어찌 친구와 같겠나.”연암 박지원이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1792년 1월, 경남 함양군 안의 현감에 부임해 1796년 2월까지 있었다. 이 편지는 1793년 1월에 세상을 뜬 이덕무(1741-1793
꿈에 한 누각으로 들어갔다. 연암 박지원이 18~19세 시절이었다. 마치 관청 건물이나 절간의 대웅전 같았다. 좌우에 비단으로 덮은 상자와 서가가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화병에 꽂힌 채 지붕에 닿을 만한 푸른빛의 새 깃털을 보았다. 공작이었다. 훗날 연암은 생계형 관직에 나가 1791년 경상도 안의 현감으로 부임했다. 연암은 그곳의 아름다운 산수에 무척 만족해했다. 이때의 일을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렇게 적었다.“관아 한 곳에는 2층으로 된 창고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퇴락한지 이미 오래됐다. 연못을 파고 아래
태초에 원숭이가 있었다. 요즘에는 성경 에 나오는 신에 의한 인간의 창조를 사실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있다면 과학적 지식에 눈과 귀를 닫고 사는 사람이다. 성경은 믿음을 요구하지만 과학은 증거로 대답한다. 우주의 탄생부터 지구의 생성, 인류의 기원과 생물의 진화 과정이 학문으로 정립됐다. 정말 인간의 조상이 침팬지인가?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적으로 겨우 1.6%의 차이가 나는데, 정확이 어떤 유전자가 다른 걸까? 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 인간의 진화와 지구의 지배 과정, 언어
이랴이랴 소 모는 소리 흰 구름까지 울려 퍼지고하늘 찌르는 푸른 봉우리엔 비늘처럼 촘촘한 밭고랑견우직녀는 어찌하여 오작교로만 건너려 하는 고은하수 서쪽 가에 달이 걸려 배 같은데 / ‘산행(山行)’연암 박지원이 어느 날 이른 아침, 길을 가다가 읊은 시인 듯하다. 구절구절이 그림이다. 문득 연암은 견우직녀가 떠올랐을까. ‘견우직녀는 어찌하여 오작교로만 건너려 하는가’란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음력 7월 7일에는 전 세계의 까마귀와 까치가 모여 사랑의 가교를 만든다. 까마귀(烏) 까치(鵲) 다리(橋), 바로 오작교다.<춘향전>에서 춘향
독작독음(獨酌獨飮). 백수를 자청한 연암 박지원은 혼자 노는 삶을 즐겼다. 요즘 말로 ‘혼술 혼밥’도 잦았다. 젊어서는 우울증으로도 고생했다. 폐인처럼 지낸 날도 부지기수. 친한 친구의 억울한 죽음을 겪으면서 과거 급제를 통한 출세의 의지를 완전히 내던지게 된다. 줄곧 동경하던 열하로 가는 여정에서도 그랬다. “좋은 울음 터다. 한바탕 울만하구나.”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첫발을 내디딘 연암이 요동 벌판을 보며 내지른 일성이다. 물론 흔히 말하는 울음과는 거리가 멀다. 연암은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보고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벅찬 감
무더운 한여름, 아마 1773년 경 8월쯤 되었겠다. 어느 날 밤. 몇몇 한량들이 서울 남산 아래 담헌 홍대용의 집에 모였다. 목적은 운치 있는 작은 음악회. 참석자 면면은 대강 이렇다. 풍채 좋고, 멋쟁이 수염을 가진 신사 담헌 홍대용, 당대의 가객이자 현악기의 달인 김억, 퉁소의 명인 국옹 이한진, 그리고 연암 박지원. 각자 내공이 대단한 고수들이 모인 모임이다.밤이 고즈넉이 깊었을 무렵, 일행은 담장 바깥 홍대용의 별서 정원 유춘오(留春塢·봄이 머무는 언덕)로 자리를 옮겼다. 조명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반달이 떠 있는 밤, 홍
1777년 7월 28일. 한 여름 삼복 오후. 정조가 등극한지 1년이 넘어선 25살 때였다. 세 명의 건장한 사내가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앞 보신탕집에 들어갔다. 그 식당은 궁궐 정문 앞에 위치한 데다, 제법 맛집으로 소문났던 모양이다.궁궐의 호위군관인 강용휘가 단골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강용휘·전흥문·홍상범 이들 셋은 보신탕 값으로 3푼을 치렀다. 강용휘는 쇠몽둥이 철편을, 전흥문은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서 궁에 잠입했다. 홍상범은 20명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상황을 보고 대응키로 했다. 다행히 이들의 정조 암살 기도는 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