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야 극락 가자’란 팻말이 아직 붙어 있을지 모르겠다. 순천 선암사 명물 해우소에. 언뜻 보면 도무지 화장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통풍까지 신경 썼다. 연륜 있는 곱게 늙은 절집에 운치를 더해준다. ‘나비야 청산 가자’란 말보다 어느 게 나을지는 아직 판단이 안 선다.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고 했다.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고.

200여 년 전 파리를 보고 목 놓아 운 이가 있다. 1801년 11월 22일,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도착했다. 날은 춥고, 마을 분위기는 싸늘했다. 간신히 읍내 주막집 노파의 호의로 뒷방에 지친 몸을 뉘었다. 강진에서 첫 거처는 주막이었다. 다산의 유배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주막집,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에서 8년을 보낸 뒤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강진에 유배된 지 10년째 되던 1810년, 다산은 난데없이 「파리를 조문하는 글」을 쓴다. 풍자가 가득한 특이한 글이다. 다산은 파리를 의인화해,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조명한다. 비교적 잘 알려진 조선 순조 때의 우화, 바늘을 제사지낸다는 ‘조침문(弔針文)’과 유사한 서사 구조다.

그런데 뜬금없이 왜 파리일까? ‘파리=백성.’ 가뭄과 혹한, 돌림병, 관리들의 학정까지 겹쳐 굶어 죽은 백성들의 화신으로 본다. 기구하게 산 백성인 파리를 위해 다산은 음식을 차려 조문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설적으로 파리를 조문함으로써 왕을 귀머거리와 장님으로 만든 벼슬아치들을 비판한다. 

가엾은 백성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민의 정과 자신들의 배만 불리면서 백성을 착취한 탐관오리의 횡포가 잘 드러난다. 나중에 <목민심서>이 배경이 되는 현장 보고서 ‘프리퀄’ 격이다. 다산은 ‘파리에게 극락 가자’고 가장 먼저 권한 살아있는 생불이었던가.

다산은 ‘쥐와 야합한 고양이’란 우화시에서도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잡으라는 쥐는 안 잡고, 엉뚱하게 고기와 양식을 훔치는 정황을 풍자했다. 다산이 볼 때 도둑고양이 같은 위정자는 좀 도둑인 쥐보다 더 흉악한 존재였다.

선암사 해우소

파리를 조문한다(조승문·弔蠅文)

다산이 우화 시문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유배 때부터다. 유배 초기의 작품들은 대개 중앙 정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다뤘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귀양 온 자신의 우울한 심경을 담았다. 유배 첫해인 1801년, 다산은 ‘해랑행(海狼行)’이란 시를 지었다. 범고래와 큰고래의 싸움을 소재로 권력과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지배계층의 암투를 풍자했다.

그런데 유배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산의 우화 스타일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산이 우화 시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크게 변화한다. 다산은 더 이상 중앙 정치 무대의 정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서라기보다는 부패한 현실에 분노하기 시작한다. 변방으로 쫓겨나면서 뜻을 펴지 못한 절망을 달래지도 않는다. 대신 개인적 ‘울분’을 넘어 백성이 겪는 고통을 끌어안는 ‘공분’으로 확장된다.

다산은 밑바닥 백성의 힘겹고 신산한 삶을 더욱 날카롭게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목도한 당시 조선 사회의 심각한 모순들, 특히 고을 수령이나 아전들의 가혹한 수탈과 무능에 죽비를 내리친다. 유배생활 10년 차가 되던 해에 지은 ‘파리를 조문하는 글(조승문·弔蠅文)’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1803년부터 1830년까지 조선은 거의 매년 가뭄에 시달렸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많은 기우제를 지냈다. 다산이 ‘파리를 조문’하는 글을 쓰기 직전 1809년 조선에는 전국적으로 큰 가뭄이 들었다. 음력 5~6월에만 9차례에 걸쳐 북한산·남산·한강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을 정도.

호랑이 머리를 잘라 한강에 넣는 기우제까지 벌였지만 소용없었다. ‘침호두(沈虎頭)’ 의식은 태종 연간부터 가뭄이 심할 때면 관행으로 행해왔다. ‘용호상박’이라는 말처럼, 물을 관장하는 용과 지상의 호랑이가 싸울 때는 비가 온다는 풍습에서 유래했다. 그해 11월 순조 임금은 국왕의 내탕전(업무추진비) 2만 냥을 풀어 흉년이 심한 호남 지방 구휼에 나섰다.

선암사 해우소 창에 쓴 ‘파리야 극락 가자’

조선 후기는 ‘군도(群盜)’ 세상 

다산이 유배 중인 전남 강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농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잇단 가뭄과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없었다. 겨울에는 유난히 추운 혹한까지 겪었다. 지방 아전의 수탈과 학정 또한 극심했다. 게다가 전염병도 돌았다. 백성들의 시신이 길에 널리고, 언덕을 뒤덮었다. 길거리에는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유랑민이 가득했다. 살길이 막막한 해안가 백성들은 출입이 금지된 울릉도까지 해물과 고기잡이에 나섰다.

다산의 ‘탐진어가(耽津漁歌)’ 8장에는 강진의 어민들이 울릉도로 홍합 잡으러 간다고 썼다. 다산의 제자 황상 역시 남포 주민들이 울릉도로 나무를 베러 갔다는 시를 남겼다. 아예 일본으로 이주해 살 길을 도모한 백성도 생겼다. 혹독한 가뭄이 든 이듬해 여름. 온 천지에 파리가 극성을 부렸다.

강진에도 파리 떼가 들끓었다. “엄청난 파리 떼가 산과 골을 뒤덮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도 엉겨 붙고, 술집과 떡 가게에도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노인들은 괴변이라 탄식하고, 소년들은 파리와 한바탕 전쟁을 벌이려 했다.” 다산은 파리 떼를 보고 대기근의 참상을 떠올린다. 차마 파리를 죽이지 못하고, 제문을 쓰고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

1811년(순조11)에는 4~5월 사이 극심한 가뭄으로 15번의 기우제를 지냈다. 그 무렵 전국적으로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상황은 다산의 저작들에서 너무도 극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산 또한 민란의 조짐을 직감했을까. 급기야 그해 12월 농민 항쟁 ‘홍경래 난’을 필두로 조선은 떼도둑 이른바 ‘군도(群盜)’ 세상이 된다.

“근래에 와서 조세와 부역이 무겁고도 번잡하며 관리들의 횡포가 심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대부분이 난리를 생각하게 되었으므로, 요사스러운 말과 망령된 말들이 동쪽에서 나면 서쪽에서 화답하니 이것을 법에 따라 처단한다면 백성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목민심서 권8, ‘응변(應變’>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파리를 죽여서는 안 된다

다산은 왜 파리가 창궐했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파리를 죽이지 말라고 호소한다. 결국 파리가 만연한 것은 그만큼 백성들이 많이 죽었다는 반증이다. 수의도 관도 없었다.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고, 썩어가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파리와 시신들이 뒤엉켜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참상을 묘사하고 슬픔과 분노를 드러낸다.

“아, 파리를 죽여서는 안 된다. 이들은 굶주려 죽은 백성들의 몸에서 나와 기구하게 살아남았다. 냇가의 모래보다 만 배나 더 많은 구더기가 생겼다. 이 구더기에 날개가 돋아 인가로 날아온 것이다. 아, 그러니 어찌 이 파리들이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니겠는가. 너희들을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마련해 널리 너희들을 부르니, 서로 알려 함께 와 이 음식을 먹어라.”

다산은 굶어 죽은 백성의 전신인 파리를 위해 소반 위에 흰쌀밥과 국, 잘 익은 술과 식혜, 만두를 차렸다. 어서 와서 타는 목을 축이고 허기진 배를 채우라고 권한다. 초장과 파, 농어 생선회도 갖춰 놓았고, 도마에 남은 고기가 넉넉하다. 배고파서 훌쩍훌쩍 울지만 말고, 부모와 처자 동료까지 모두 데리고 와서 실컷 포식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산은 파리가 배부르게 먹을 곳을 잘 찾기를 바란다. 산해진미가 널린 유일한 곳은 바로 관청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곳은 단단히 가로막혀 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파리들아 관아에 들어갈 생각일랑 말아라. 깃대와 창대가 삼엄하게 꽂혀 있다. 돼지고기, 쇠고기 국이 솥에 가득 있고, 메추리구이, 붕어 지짐에 오리 탕까지 끓였다. 꽃무늬 조각한 약과와 수정과도 차려 놓았지만, 커다란 부채를 휘두르는 통에 너희들은 엿볼 수조차 없다.”

관아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자못 해학적이다. 호랑이 같은 문지기들이 철통같이 막고 서서 파리들이 애원하는 소리는 들은 척도 안 한다. 되려 소란 피우지 말라고 호통만 친다. 수령은 안에 앉아 제멋대로 판결한다. 역마를 달려 보고하는데, 내용인즉 “마을이 모두 편안하고, 길에는 굶주려 수척한 사람 없으니 태평할 뿐 아무 걱정 없다.”

다산의 비난은 계속 이어진다. “대나무처럼 빽빽이 늘어선 사람 중에 간신히 선택된다 해도, 멀건 죽 한 모금 얻어 마시는 게 고작이다. 묵은 곡식에서 생긴 쌀벌레는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돼지처럼 살찐 건 힘깨나 쓰는 아전들이다.”

염량세태, 봉황은 입 다물고, 까마귀 떼만 짖어댄다

다산은 차라리 파리가 되어 이런 참혹한 현실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 낫다고 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영원히 어둠 속에 있는 파리에게 축하를 전한다. 그리고 부디 날아가서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금으로 빼앗기고 매까지 맞아 죽을 지경이지만, 어느 곳에도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데가 없기 때문이었다.

또 이런 현실을 빗대 “파리야 날아가거라. 혼이라도 돌아오지 마라. 어진 이는 움츠리고 아전만 설치니 봉황은 입 다물고, 까마귀 떼만 짖어댄다”고 일갈한다.

이어지는 구절은 더 기가 막힌다. 죽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죽어도 내야 할 세금은 남아 형제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6월이 되면 벌써 세금 독촉하는 아전이 문을 걷어찬다. 그 호령 소리가 사자의 울음소리 같아 산천을 뒤흔든다. 세금 낼 돈이 없다고 하면 가마솥도 빼앗아 가고, 송아지와 돼지도 끌고 간다.

그러고도 부족하면 불쌍한 백성을 관가로 끌고 가 곤장으로 볼기를 친다. 매 맞고 돌아오면 기진하여 염병에 걸려서 푹 쓰러지듯, 고기가 뭉크러지듯 죽어 가지만, 그 숱한 원한을 천지 사방 어느 곳에도 호소할 데 없다. 백성들은 굶어 죽어 가는데, 관가에는 풍악소리 요란하다. 기생들은 빙빙 돌며 춤을 추고 교태를 부린다.

다산은 파리에게 차라리 살 길을 찾아 북쪽으로 날아갈 것을 재촉한다. 천리 북쪽의 궁궐로 날아가 백성들의 참상을 밝히고, 하늘에 고해 어진 정치를 베풀어 달라고 염원한다. 그래서 풍년이 들면 굶주리는 일이 없을 테니 그때 다시 남쪽으로 날아와도 된다는 것이다.

“파리야 북쪽으로 날아가라. 천리를 날아 임금 계신 궁궐에 들거든 충정을 호소해라. 깊은 슬픔을 낱낱이 밝혀라. 하늘의 위엄이 우레처럼 격발하면, 풍년을 들게 하여 굶주리는 일은 없게 될 것 아니냐. 그때 다시 남쪽으로 오거라.”

이 글을 쓴 1810년은 정조가 죽고 난 뒤, 10년 뒤다. 다산은 파리를 들어 세태를 고발하고 분노한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매 맞아 죽은 시신에 파리가 득실거리는 당시의 참상이 충격적이다. 부패한 관리들의 모진 횡포를 파리를 빗대 풍자하는 글이지만, 그 표현이 너무나 생생하고 신랄하다.

오죽하면 파리조차 백성들과 같은 동병상련으로 여길까. 다산의 우국 애민의 정신을 글로 표현한 게 우화 시문이라면, 책으로 엮은 게 바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이다. 다산이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마음을 다해 눈물로 쓴 수많은 저작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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