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5년 3월 5일, 조선에서는 51년 7개월간 역대 최장수 왕위를 누렸던 영조 시대가 마감됐다. 닷새후 10일 정조가 즉위했다. 그해 11월 5일,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했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 규장각은 많은 책을 편찬하고,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는 왕실 도서관 역할을 맡았다.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 기능과 과거 시험의 주관,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했다.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그리고 서이수 같은 실학자와 서얼 출신의 학자들도 채용했다. 정조는 ‘문치주의’와 ‘인재 양성’을 표방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하면서 문예부흥의 꽃을 피웠다.

같은 시기 1776년 영국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간했고, 7월에는 미국이 독립을 선언했다. 국부론은 자본주의 이론적 근거를, 미국 독립선언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토대를 마련했다. 인류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인 제1차 산업혁명의 원년이기도 하다. 영국의 매튜 볼턴과 제임스 와트가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이후 증기기관이 모든 기계에 동력으로 사용되어 대량생산 및 대량운송이 가능해졌다. 영국의 생산제품이 전 세계로 수출되면서 영국은 1차 산업혁명의 선두 국가가 되어 세계 강국이 된다.

 

▲ 창덕궁 규장각 앞 연못인 부용지. 연회 중 정조가 장난으로 낸 문제를 못 맞추면 부용지 안에 있는 작은 섬으로 유배(?) 보냈다. 당대의 천재였던 정약용도 그 섬으로 유배 간 적이 있다.
▲ 창덕궁 규장각 앞 연못인 부용지. 연회 중 정조가 장난으로 낸 문제를 못 맞추면 부용지 안에 있는 작은 섬으로 유배(?) 보냈다. 당대의 천재였던 정약용도 그 섬으로 유배 간 적이 있다.

■ 다섯 종류의 새를 소재로 삼아 인재 등용을 논한 ‘오객기’

정조는 재능 있고 젊은 인재를 선발해 규장각에 소속시켜 학문을 연마하게 했다. 이른바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였다.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세력 기반을 만들고, 여러 이념과 정책에 대한 연구를 해보려는 목적이었다. 초계문신은 37세 이하의 엘리트 관리(당하관) 중에서 선발했다. 정조는 재위하는 동안 초계문신을 10회에 걸쳐 134명을 뽑았다. 초계문신 제도는 조선 전기 시행되던 사가독서제의 전통을 이은 것. 본래 직무를 면하게 해주고, 연구에 전념하게 했다.

공부에만 전념하면 된다고 하니, 언뜻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1달 평균 2회의 구술시험과 1회의 논술고사로 성과를 평가했다. 정조가 직접 강론에 참여하거나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까지 했다. 정조는 재위기간 1347편의 어제를 내려 시험을 치렀다.

다산 정약용 역시 초계문신 시절을 보냈다. 28세 때인 1789년(정조13) 1월 식년 문과에서 갑과 2인으로 합격해 바로 좌의정 이성원이 뽑은 초계문신에 들었다. 1790년 어느 날 정조가 논술시험 문제를 냈다. 문제는 ‘오객’, 형식은 기(記).

‘오객’이란 중국 송나라 때 이방이 오객당(五客堂)의 벽에 그려 놓은 벽화다. 백한조(흰 꿩), 백로, 학, 공작새, 앵무새 등 각기 다른 다섯 마리 새를 그렸다. 백한조는 중국 강남 지역에 사는 흰 꿩의 일종. 등에 가는 검은 무늬가 있으며 집에서 관상용으로 길렀다. 일단 이 ‘오객’이란 그림을 알고 있어야 하고, 이를 토대로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내용으로 작성해야 했다. 여러 가지를 한 번에 평가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문제였다. 향후 국가를 이끌 관료를 향해 정조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인 동시에 다산의 지식과 식견이 종횡으로 엮어져 있는 지적 대응이었다. 자, 그럼 다산은 어떻게 답했을까?

다산은 다섯 마리 새를 한 재상집에 식객으로 찾아온 다섯 나그네에 비유한다. 내용은 당시 정조가 갖고 있던 가장 큰 고민 인재 등용 방식에 초점을 맞춰 풀어나간다. 다양한 고사를 활용하여 다섯 종류의 새들을 의인화했고, 문답 기법을 통해 글의 생동감을 더한 명문장이다. 내용을 대략 풀어보면 이렇다.

▲ ‘오객도’ 백로, 흰 꿩, 학, 공작새, 앵무새 각기 다른 다섯 마리 새를 그려놓은 그림
▲ ‘오객도’ 백로, 흰 꿩, 학, 공작새, 앵무새 각기 다른 다섯 마리 새를 그려놓은 그림

■ 두꺼비는 땅이 얼더라도 깊이가 몇 자가 되어 몸이 얼지 않는다

사람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대개 위세가 대단하다. 세력에 의지하고 혜택을 입기 위해 사람들이 개미처럼 떼 지어 모이고, 파리같이 웅성거리면서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그러나 유독 심주의 재상 ‘이상국’은 그렇지 않았다. 성품이 담담하고 소박해 시끄럽고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위가 삼공(三公) 재상 반열에 이르렀으나 집안이 조용하여 새 그물을 칠 정도였다. (한나라 때 적공이 벼슬이 높을 때는 손님이 많이 들끓었으나, 파직된 뒤에는 문밖이 조용하여 새그물을 칠만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찾아오는 사람이 없음을 말함)

어느 날 재상의 집에 세 나그네가 들었다. 모두 의상이 기이하고 얼굴도 희었다. 그중 한 나그네가 말했다. “내 성품은 한가한 것을 좋아하여 행동거지를 바삐 한 적이 없는데, 눈을 만나 흰빛을 잃었다. 그러자 이태백이 나를 업신여겨 흰 구슬 한 쌍으로 나를 사서 하인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니, 될 법이나 한 일인가?”(당나라 이백이 추포가 등에서 “흰 구슬 한 쌍으로 그대의 백한조 한 쌍을 사고 싶소”에서 따온 말)

또 다른 나그네가 말했다. “나는 어려서 가난할 때 제나라와 노나라에 유람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서리와 눈이 옷에 가득 내렸고, 남을 위해 절구질과 호미질을 해 주다가 절굿공이에 잘못 맞아 한쪽 발이 오그라들었다. 늙어서는 경호(鏡湖)에 이르러 호를 벽계옹이라 했다. 우연히 저 소용돌이에서 목욕을 했는데, 두보가 나의 심성을 의심했으니,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닌가?” (두보의 시에 ‘소용돌이에서 목욕하는 백로는 무슨 심성인고?’에서 따온 말)

또 다른 나그네가 목을 길게 빼고 오만스럽게 애써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본래 선골(仙骨)로서 대대로 청전(靑田·신선이 산다는 곳)에 살고 한가롭게 노닐었는데, 이에 장자가 망령되이 나의 다리가 긴 것을 문제 삼았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지금 공에게 의탁하오니 공은 불쌍히 여겨 주소서.” (‘장자 변무(騈拇)’에 “학 다리가 아무리 길어도 잘라 주면 슬퍼한다”는 것을 가리킴) 재상은 그들을 머물게 하고, 먹을 것을 보살펴 주어, 서로 우익(羽翼)이 되게 했다.

세 나그네가 머문 지 1년 남짓 되었을 때, 두 나그네가 또 찾아왔다. 모두 비단 모자에 비단 옷을 입고 금과 벽옥(碧玉)으로 영롱하게 꾸몄다. 출신을 물으니 하나는 남월(南粤), 다른 하나는 서번(西蕃)에 있다고 했다. 재상은 평소에 화려한 것을 싫어해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유별나게 말주변이 좋으므로 하룻밤 묵어갈 것을 허락했다.

그러고 보니, 한 나그네는 성품이 시기가 많아서 무늬 놓인 비단옷 입은 아녀자를 보면 반드시 쫓아냈다. 또 다른 나그네는 영민하기는 하나 수다스럽게 입놀림만을 숭상하여 말을 조심하는 뜻이 없었다.

▲2020년 4월 29일 충남 공주시 금강 변에서 발견된 흰 꿩. 색소 결핍 현상으로 눈과 뺨을 제외한 다른 부위가 희다. 흰 꿩은 좋은 일을 가져오는 새로 여겨질 정도로 귀한 동물이다. 신라 시대 때부터 길조(吉鳥) 즉, 상서로운 동물로 취급 했다. 국내 야생에서는 몇 년에 한 번 정도 드물게 보고된다.
▲2020년 4월 29일 충남 공주시 금강 변에서 발견된 흰 꿩. 색소 결핍 현상으로 눈과 뺨을 제외한 다른 부위가 희다. 흰 꿩은 좋은 일을 가져오는 새로 여겨질 정도로 귀한 동물이다. 신라 시대 때부터 길조(吉鳥) 즉, 상서로운 동물로 취급 했다. 국내 야생에서는 몇 년에 한 번 정도 드물게 보고된다.

■ 적재적소에 쓰는 게 인재 등용의 핵심

재상은 그들을 물리치려고 했으나, 앞서 온 세 나그네가 청했다. “공은 어찌하여 기량이 그렇게 작습니까? 대체로 재상이 사람을 택하는 데 있어서 혹 몸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잘 닦은 사람을 택하기도 하고, 혹은 문채가 아름다운 것을 택하기도 합니다. 저 두 나그네가 비단옷만을 입고 자라나서 산야(山野)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래도 스스로 재주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데, 어찌 상공의 문하에서 용납이 되지 않겠습니까?”

재상은 “맞는 말이다”하고 그들을 객관에 머물도록 했다. 다섯 나그네가 둘러앉으니, 각기 다른 정취가 있었다. 마침 천자가 어진 이를 목마르게 구했다. 재상은 그들을 추천하기로 했다. 동작이 우아하여 망령되이 바쁜 걸음을 걷지 않는 나그네(흰 꿩)는 한가한 자리에 임용하여 백관(百官)의 법이 되게 할 만하다. 어릴 때부터 몸소 절구질과 호미질을 하는 등 농사일하며 고생했던 나그네(백로)는 토지나 세금을 관리하는 부서에 기용해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살피면 좋겠다.

자칭 선골(仙骨)이라고 한 나그네(학)은 허황되지만 세상 풍속을 연마시킬 만하다. 화려하게 꾸민 나그네(공작)는 문단이나 문화계(문원·文苑)에 임용해 임금의 정사를 보필하게 하면 된다. 말은 많지만 똘똘한 나그네(앵무)는 옳은 말을 거침없이 해야 하는 왕의 비서, 승지 벼슬에 앉히면 딱이다!

이에 각각 아름다운 호(號)를 주어 점잖은 한객(閑客·흰 꿩), 온갖 풍상을 겪은 설객(雪客·백로), 세상을 살피는 선객(仙客·학)이라 했다. 나중의 두 나그네는 본래 남쪽과 서쪽 지방에서 왔으므로, 남객(南客·공작), 농객(隴客·앵무)으로 부르게 됐다.

다산은 사람마다 장단점을 파악해 그 재능에 따라 적재적소에 쓰는 게 인재 등용의 핵심임을 피력했다. 다산의 답안은 정조의 문제의식에 완벽하게 부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산과 송상렴 등이 모두 차상(次上)을 맞아 등급이 똑같았다. 그러자 정조는 친히 ‘분유사(枌楡社)’ 라는 어제를 내고, 문체는 칠언 고시로 2차 비교 시험을 치렀다. 이때는 다산이 1등을 했다. 이보다 한해 앞선 1789년 정조가 직접 진행한 친시에서도 다산이 1등을 차지했다. 조선의 지리적 상황을 점검해보라는 문제였다. 다산은 울릉도와 독도의 방어책까지 기술했다.

▲ 정조의 친시에 응한 다산 정약용의 답안지. 정성 들여 쓴 글씨와 훌륭한 내용이다. 이쯤 되면 최고 점수를 받아도 마땅할 것 같은데, 이 답안지에는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빨간색으로 크게 쓴 ‘차상’이란 글씨. 바로 다산의 성적이다. ‘어고(임금이 직접 채점함)’라고 쓰여있는 것으로 볼 때 정조가 직접 쓴 글씨로 추정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 정조의 친시에 응한 다산 정약용의 답안지. 정성 들여 쓴 글씨와 훌륭한 내용이다. 이쯤 되면 최고 점수를 받아도 마땅할 것 같은데, 이 답안지에는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빨간색으로 크게 쓴 ‘차상’이란 글씨. 바로 다산의 성적이다. ‘어고(임금이 직접 채점함)’라고 쓰여있는 것으로 볼 때 정조가 직접 쓴 글씨로 추정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 달팽이 뿔 위의 싸움

달팽이 두 뿔에 촉(觸)나라와 만(蠻)나라가 있었다. 두 나라는 영토 싸움을 반복했다. 죽은 자가 수만을 헤아렸다. 15일에 걸친 격전 후에야 겨우 군대를 철수했을 정도. 달팽이 더듬이 위에서 싸운다는 <장자>에 나오는 ‘와각지쟁(蝸角之爭)’ 고사다. 하찮은 일로 승강이하는 짓을 뜻한다. 1801년 다산이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을 때도 피 튀기는 당쟁을 비판하면서 상생의 정치를 기원했다.

아옹다옹 싸움질 제각기 외고집
객지에서 깊이 생각하니 눈물 줄줄 흐르네
산하는 옹색하게 삼천리뿐인데
비바람 섞어 치듯 다툰 지 이 백 년
수많은 영웅들이 슬프게도 출세를 못했으니
어느 때에야 형제들 전답 싸움 부끄러워하리
만약 만곡의 은하수로 씻어낸다면
상서로운 햇빛이 온 세상을 비출 텐데 <다산 정약용, ‘견흥(遣興)’>

다산은 우리나라 당쟁을 달팽이 뿔 위의 싸움과 다를 게 없다고 봤다. 조선의 산하는 삼천리에 불과한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동인·서인·남인·북인으로, 다시 노론·소론으로, 그리고 벽파·시파로 나누어져 치열하게 싸운 지 200년이 된 것을 한탄했다. 그런 당쟁은 다산의 시대에 종언을 맞았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다산이 지적한 것처럼, 그때 데자뷰(dejavu;기시감)는 지금도 곳곳에서 여전하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0109151425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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