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인삼이 시작된 개삼터 공원.

인삼은 언제부터 재배되었을까?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조선초설, 조선 중기설이 있고 풍문으로 충남 금산, 경북 풍기, 전남 화순이 재배 시원지라는 설이 있다. 그중 여말 선초설이 가장 유력하다. 원나라의 인삼 조공 요구가 극심해지면서 산삼을 남획하는 바람에 산삼이 귀해졌다. 그러자 민가에서 산삼 씨앗을 받아 산속에서 키우는 산양삼 재배가 시도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는 인삼 재배를 처음 시작했다는 개삼터(開蔘地) 공원이 조성돼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 330개 군현의 약재 산출지를 기록한 것이 나온다. 그런데 금산은 여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산군이 인삼 산출지로 기록돼 있다. 금산과 인접한 진산군은 1814년 금산군으로 편입됐는데 현재의 금산군 진산면이다. 이는 금산에서 인삼이 산출됨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산삼이 풍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금산은 뒤늦게 인삼 재배가 성행해 현재와 같은 인삼의 고장으로 자리 잡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금산의 인삼 재배 기원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다. 경북 풍기와 전남 화순이 ‘문헌비고’ ‘중경지’ 등에 전해지는 것과 달리 금산은 언론을 통해 설로 전해진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진짜 고려인삼 이야기’에는 일제강점기 동안 발행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내용을 소개했다. 1460년경 금산면 상옥리에 김 씨 성을 가진 과부가 진악산에서 삼지오엽에 선홍색으로 달린 열매를 따 정원에 심었다. 이듬해 봄에 새싹이나 이를 몇 년 동안 재배했다. 김 과부의 외동아들이 열 살 때 불치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는데 재배하던 인삼 뿌리를 먹였더니 불치병이 나았다. 이 소문 이 전파돼 인삼을 재배하는 농가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매일신보>는 인삼 재배 설화를 주인공만 바꾼 채 또 다른 내용으로 싣기도 했다. “금산 읍내 중도리에 사는 강방환의 6대조 강득무가 진악산 아래에 있는 금산면 계진리에 거주하던 중 관남봉에서 산삼을 채취해 그 열매를 따다가 재배를 시작했다”고 정리한 것이다.

금산의 인삼 유래를 전한 <매일신보> 기사는 화순의 인삼 재배 설화와도 약간 비슷하다. 1929년 금산군 산업 기수였던 호소카와 간지(細川治一)는 “김립이라는 사람이 1770년경 개성으로부터 인삼 종자를 가지고 와 묘포를 만들어 시작했고 성과가 좋아 육묘를 개성 인삼업자에게 판매하면서 시작됐다”고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호소카와의 말처럼 금산은 18세기 후반 인삼 산지로 부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18세기 말에는 영남과 마찬가지로 인삼 재배법이 보급되던 시기였고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금산군읍지’에는 인삼이 주요 물산으로 등재돼 있다.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품목이 새로 등장한 것은 뒤늦게 재배가 성행했음을 의미한다.

지금 뭐니뭐니 해도 금산을 대표하는 것은 단연 인삼으로, 긴 말이 필요 없는 전국 제일의 인삼 산지이다. 금산읍에 전국 최대 규모의 인삼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한창 잘나갈 때는 전국에서 유통되는 인삼의 70~80%가 금산에서 거래됐다. 영광군의 굴비, 순창군의 고추장 등과 함께 지역 특산물이 지역의 네임 밸류로 정착된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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