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떠난 대략 1801년경쯤 태어난 ‘모비 딕(Moby Dick)’이라는 향유고래가 있었다. 난폭하기로 유명했던 이 고래는 매우 영리해서 뱃사람들 사이에 악명 높았다. 1819년 여름, 238t의 포경선 ‘에식스’호는 미국 매사추세츠 낸터킷 섬에서 출항해 고래잡이에 나섰다. 1800년부터 1840년까지 낸터킷은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포경선 항구였고, 지역 경제는 포경업에 의존했다.

1820년 11월 20일 ‘에식스’호는 남태평양에서 24m가 넘는 ‘모비 딕’에 받혀 침몰한다. 겨우 살아남은 폴라드 선장과 선원 19명은 3척의 구명보트에 나눠 타고 망망대해를 헤맸다. 7,200㎞를 표류한 끝에 93일 만에 칠레 인근에서 구조됐다. 살아남은 선원은 겨우 8명. ‘에식스’호 선원들의 기적 같은 생환을 다룬 논픽션 소설 <바다 한가운데서· In the Heart of the Sea>는 구조 당시 처참한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선원들의 살갗은 온통 종기로 덮였다. 눈은 두개골의 움푹 팬 곳에서 툭 튀어나와 있었으며, 턱수염에는 소금과 피가 엉긴 채 말라붙어 있었다. 그들은 죽은 동료 선원의 뼈에서 골수를 빨아먹느라고 정신없었다.” 생존한 선원들은 물과 식량 없이 3개월간 표류하면서 제비뽑기로 동료의 인육까지 먹었던 것이다. 19세기 최대의 해양 참사였다.

3년 후, 조지 폴라드 선장은 다른 포경선 ‘투 브라더스’호를 타고 다시 항해에 나섰다. 1823년 2월 11일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태평양 하와이 근처를 지나다가 산호초에 좌초됐다. 배가 가라앉는 사이 선원 약 20명은 다른 포경선의 도움으로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에식스’호의 비극을 딛고 재기를 꿈꿨던 폴라드 선장은 불운했다. 폴라드 선장은 ‘투 브라더스’호 마저 침몰하자, 결국 뱃사람으로서의 꿈을 접고 여생을 뭍에서 야경꾼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조지 폴라드 선장은 허먼 멜빌(1819~1891)의 명작 소설 <모비 딕>이 탄생하는 데 많은 영감을 줬다.

‘에식스호’를 침몰시킨 다음에도 모비 딕은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과 사투를 벌였다. 모비 딕의 활약은 1851년 포경선 앤 알렉산더호를 부숴버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1859년 몸에 19개나 되는 작살을 맞고 잡혔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폴라드 선장의 꿈과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던 포경선 ‘투 브라더스’호는 해양 고고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정확히 188년 만인 2011년 2월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배 대부분은 약 200년간 하와이의 따뜻한 물속에 잠겨 있으면서 사라졌지만, 작살과 고래기름 정제용 냄비와 솥 등이 발견됐다.

포경선 에식스호 침몰 선원들의 생환 과정을 그린 영화 ‘Heart of the Sea’
포경선 에식스호 침몰 선원들의 생환 과정을 그린 영화 ‘Heart of the Sea’

19세기 포경산업은 최대의 비즈니스

고래는 참고래와 귀신고래 같은 수염고래와 범고래 같은 이빨고래 종류로 나뉜다. 대개 수염고래 종류가 이빨고래보다 크다. 향유고래는 이빨고래 가운데 가장 큰 종류다. 대왕고래로 불리는 흰수염고래는 지구상 동물 가운데 가장 크다. 평균 길이 30m, 무게 150t에 달한다.

영어 속어로 ‘Dick’은 남성의 성기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moby’는 아주 크다는 뜻. 세계에서 제일 큰 생식기를 가진 동물은 흰수염고래다. 길이가 2.5~3m, 최고 기록치는 5m. 1회 사정량은 20리터 이상. ‘진짜 모비딕’이란 이름으로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흰수염고래의 고환은 약 90kg에 불과(?) 하다. 고환만 놓고 볼 때는 몸무게가 흰수염고래의 절반에 불과한 참고래가 가장 크다. 참고래 고환은 지름 1m, 무게는 각각 500㎏이나 된다. 합쳐서 1톤. 크기도 2.7m가 넘는다. 몸에 비례해 대단히 큰 편인데, 짝짓기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유럽에서의 포경은 오랜 기간 바이킹족과 스페인 북부 바스크족(Basques)이 지배해왔다.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인디언들이 고래를 잡고 있었다. 고래는 몸이 아파 죽을 때가 되면 깊은 바다에서 육지 가까이 왔다. 인디언들은 작살을 던져 병든 고래를 잡았다. 고래는 영리해져 아파도 뭍 가까이 가지 않았다. 인디언들은 배를 타고 점점 멀리 나갔다. 이렇게 해서 고래산업이 시작됐다.

18세기부터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안 포경업이 시작되어, 점차 원양 포경업으로 발전했다. 대서양에서 포경 활동이 대폭 확장되면서 남획으로 인해 고래 개체 수가 감소했다. 그래서 19세기 초부터 남반구로 어장을 확대하게 됐다. 포경선들은 인도양과 남태평양·칠레 연안·페루 연안 등을 새로운 어장으로 개척했다. 그리고 포경산업은 마침내 동해를 포함하는 북태평양 지역으로 확장된다. 이 시기에 포경산업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세기 포경업은 미국인들이 주도했다. 미 동부 해안에 위치한 낸터킷(Nantucket)과 뉴베드퍼드(New Bedford)는 <모비 딕> 첫머리의 무대이자, 19세기 세계 포경업의 중심지였다. 프랑스·러시아·독일·영국이 미국의 뒤를 따르는 국가들이었다. 미국은 당시 가장 우수한 선원과 선박들을 보유했다.

고래산업은 19세기 가장 수익성이 높은 대박 비즈니스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석유가 대량생산되기 전까지 고래는 바다를 떠다니는 ‘자원의 보고’였다.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양초를 만드는 기름은 물론 화장품과 의약품, 공업용 세제 등의 원료를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 포경선은 19세기 중엽 미국에서 단순한 어업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미국이 신흥 산업자본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성장 동력이었다.

1927년 뉴베드퍼드에서 마지막 포경선이 출항했다. 1985년에는 세계적으로 상업포경이 금지됐다. 최근 뉴잉글랜드의 후손들은 고래와 다시 만났다. ‘죽은 고래’가 아닌 ‘산 고래’가 돈을 가져다주는 고래관광 산업을 시작했다.

영화 ‘모비 딕’. 그레고리 펙 주연/ 1956년
영화 ‘모비 딕’. 그레고리 펙 주연/ 1956년

소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포경선 선원 경험

소설 <모비 딕>을 국내에 소개한 <백경·白鯨>은 하얀 고래라는 뜻. 원래 일본에서 쓰던 번역 제목을 가져왔다. 향유고래는 몸 색깔은 어두운 회색 계열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흰색에 가까워진다.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포경선 피쿼드(Pequod)호 선장 에이해브가 고래에게 복수하기 위해 대양을 누비는 이야기다.

현재 미국의 동북부에 살던 원주민 피쿼드족은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에 의해 전멸한다. 멜빌은 포경선 이름에서 사라진 원주민을 대변하고자 했고, 상대할 수 없는 백인의 힘을 ‘모비 딕’으로 표현했다. 소설 속 고래 ‘모비 딕’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존재로 묘사됐다. 피쿼드호 선원들은 고래를 이길 수 없었다.

허먼 멜빌은 소설 집필을 앞두고 롱아일랜드 몬탁 근처 색하버(Sag Harbor)에서 실제 포경선을 탄 경험을 가진 특이한 이력의 작가다.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1840년 1월 초 태평양으로 출어하는 포경선에 승선해 장장 3년 10개월이 걸린 고래잡이 여정을 떠났다. 멜빌은 여러 포경선을 탔는데, 그 와중에 몇 달간 남태평양 식인 원주민 마을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바다에서 낚시하듯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포경선을 탔고, 몇 년간 선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영국 도서관에서 <모비 딕>은 ‘19세기 문학’이 아니라 ‘고래학’으로 분류됐다. 정말 웃지 못할 이야기다.

소설에는 고래 포획과, 포경선에서의 삶, 낸터킷의 포경산업이 그려졌다. 이 책은 그만큼 백과 사전식 섬세한 묘사와 진지한 무게를 지닌 소설이다. 1851년 발표된 <모비 딕>은 멜빌이 죽은 후 30년이 지나서야 ‘19세기 미국이 낳은 명작’으로 평가받았다.

스타벅스 커피와 시애틀 중앙도서관은 시애틀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또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시애틀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세계적 커피 브랜드의 대명사가 된 ‘스타벅스’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1971년 일이다.

스타벅스 초기의 이름은 소설 <모비 딕>에 등장하는 포경선 ‘피쿼드’로 지어졌다. 그런데 다른 동업자가 피쿼드호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으로 지을 것을 고집해서 이름이 바뀌었다. 스타벅(Starbuck) 이라는 이름에다가 복수형 ‘S’를 붙였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어 ‘사이렌’을 심벌로 삼았다.

소설 속 ‘스타벅’이 커피를 무척 좋아해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것은 거짓. 눈 씻고 읽어봐도 그가 커피를 마시는 장면조차 없다. 그 소설의 누구도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스타벅스 커피가 스타벅의 이름을 딴 이유는 초창기 창업주가 <모비 딕>의 열광적 팬이었고, 본거지인 시애틀이 항구도시였기 때문이다.

흰수염고래(대왕고래)와 사람 크기 비교
흰수염고래(대왕고래)와 사람 크기 비교

고래 뱃속에서 살아 나온 어부

연암 박지원과 이덕무의 친구였던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는 100여 편의 국내외 야담을 모아놓았다. 성대중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세상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사대부들과 서민들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또 온돌, 투전, 기생 등 시시콜콜한 생활풍속 외에도 제도의 모순과 허위를 꼬집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그 중 ‘고래 뱃속에서 살아 나온 어부’ 이야기 한편이 주목을 끈다.

경북 울진의 어떤 어부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 전복을 작살로 찔러 잡다가 고래를 만나 고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래 뱃속에 들어가 보니 작살을 놀릴 만큼 넓었다. 온 힘을 다해 마구 찔러 대자, 고래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어부를 토해 냈다.

간신히 밖에 나와 보니, 온몸이 허옇게 흐물흐물해지고 수염이나 머리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어부는 고래의 위액 때문인지 비록 민 대머리가 됐지만, 나이 90세가 넘도록 살았다. 천명이 다하지 않았기에 고래 뱃속에 들어가서도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

성대중은 고래의 생태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대체로 옛 시에서 고래를 묘사한 내용은 모두 잘못됐다. 고래는 단지 메기의 큰 종류로 비늘과 이빨이 없다. 그러니 두보가 지은 ‘고래 비늘은 가을바람에 움직인다(石鯨鱗甲動秋風)’이란 표현과 이백 시의 ‘큰 고래의 흰 이빨(長鯨白齒)’이란 표현은 모두 틀렸다.

고래가 비록 비늘은 없지만 그래도 어류이고, 등딱지가 있는 것은 거북이나 자라의 종류이니 어찌 혼동해서 지칭할 수 있는가. 다만 등지느러미가 있다거나 배를 삼킨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 명나라 때의 백과 사전 ‘삼재도회’ 역시 고래를 그리면서 비늘을 그렸으니, 중국사람 중에 고래를 보지 못한 자가 많은 것 같다.”

성대중(1732~1809)은 연암 박지원·홍대용·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과 교유하면서 북학사상 형성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에도 다녀왔고, 1784년(정조 8)에 지금의 포항 흥해군수를 역임했다. 흥해도 바다와 접해있다. 고래를 메기 종류라고 했는데, 실제 바다에서 고래를 체험하고 쓴 글인지는 알 수 없다. 고래는 수염고래와 이빨고래가 있는데, 범고래에 대한 우화시를 쓴 다산 정약용보다 고래의 생태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향유고래를 잡는 포경선. 손 작살은 매우 위험했다.
향유고래를 잡는 포경선. 손 작살은 매우 위험했다.

간신히 악어 밥은 면했건만, 끝내는 큰 고래 만난 다산

<청성잡기>에서는 또 산모가 해산 후 미역을 먹게 된 유래를 담았다. 어미 고래가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반드시 미역이 많은 바다를 찾아 실컷 배를 채우는데, 그 모습을 보며 교훈을 얻었다는 것. 이는 실제 사실과 부합한 내용이다. 산후조리를 위해 미역국을 먹는 건 한국에만 있는 풍속이다.

허균은 <도문대작·1611년)에서 강원도 삼척에서 정월에 딴 것이 미역이 좋다고 했다. 다산 역시 배고플 때 먹는 미역은 달다고 했다. 무엇보다 고래 입속으로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어부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다.

다산 정약용은 고래 밥이 될 뻔한 사연을 자조적으로 읊었다. 유배지 장기에서 신창리 바닷가를 구경하면서 지은 우화시다. 다산은 자신을 ‘연못 속 물고기’에 비유해 구사일생 상황을 그려낸다. ‘악어’와 ‘고래’는 알레고리적 수법으로 당시의 집권 세력인 노론을 상징한다. 용은 군주인 왕이다.

“연못 속 고기 하나 팔딱거리며/ 물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네/

연꽃 사이 들락날락 헤엄치면서/ 마음껏 뛰노는 게 제 적성인데

주제넘게 멀리 한번 가보고 싶어/ 물길 따라 흘러서 넓은 바다 들어갔다네

망망한 바다에서 길 잃고 헤매다가/ 큰 파도에 놀라기가 몇 번이던가

간신히 악어 밥은 면했건마는/ 끝내는 큰 고래 만나고 말았네

고래 숨 들이쉬자 죽은 몸 되었다가/ 내뿜을 때 다행히 살아나서는

옛날 놀던 연못이 못내 그리워/ 괴로운 맘 근심에 싸여 있는데

신룡(神龍)이 불쌍히 여겼던지/ 때마침 천둥 치고 비가 내리네 <다산 정약용 古詩 27수 중>

‘연못 속에서 놀던 물고기’가 험한 중앙 정계 벼슬길에 뛰어들어 죽을 고비를 넘긴 게 몇 번이던가. 다산은 ‘악어·고래’와 같은 무리(노론세력)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아련한 심정을 남겼다. 당쟁의 풍파 속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귀양살이를 하면서 평안했던 옛 시절을 회상한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인간은 세 가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했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모비 딕>과 다산의 생애는 이 세 가지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려준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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