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 한남대 총동문회장·(전)대전대신고 교장
박영진/ 한남대 총동문회장·(전)대전대신고 교장

텔레비전을 켜니 ‘자녀를 출가시킬 때 집을 사 주겠느냐?’는 문제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자녀를 결혼시킬 때 집을 사 준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형편이 넉넉해도 자신들의 힘으로 장만하도록 도와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요즘처럼 젊은이들이 취업하기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삼포(연애·결혼·출산) 세대니 오포(연애·결혼·출산·인간관계·내 집 마련) 세대니 하는 때 부모들이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결혼하면서 전셋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 후로 주택은행에서 이십 년 상환 융자를 받아 집을 장만하고 부금을 꼬박꼬박 갚다 보니 적은 봉급에 생활하기가 빠듯했다.

그래서 훗날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된다면 자녀들이 결혼할 때는 집을 사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암탉이 닭장 속 둥우리에 낳아 놓은 달걀을 하나둘 조심스럽게 꺼내서 바구니 속에 모으듯이, 아내는 아이들이 받아오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은행에 맡겼다.

적금통장에 넣어두었다가 만기가 되면 찾아서 장기 저축으로 바꾸어 마련한 종잣돈으로 두 아이가 결혼할 때 작은 아파트를 분양받아 살림을 내주었다. 둘째가 신혼여행을 떠나던 날 아내에게 “이제 우리가 부모 노릇 다 했으니 하나님이 데려가신다고 해도 서운할 것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자 아내는 수고 많이 했다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봄·가을로 접어들면 이삿짐을 싣고 다니는 트럭을 자주 만난다. 사업에 성공하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겨 넓은 거처를 장만해서 옮기기도 하고, 빚에 쪼들려 임시방편으로 머물 곳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게다가 도회지에서는 이사하는 것을 재테크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했다가 프리미엄을 붙여 넘기고 더 넓은 집으로 옮긴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도회지 근교에 주택을 짓고 살다가 개발이 되면 다른 곳을 찾아 떠난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떠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왜 우리는 아파트로 이사 가지 않느냐고 물으면, ‘물건은 새것이 좋지만, 장맛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더 좋은 것이다.’라는 속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학 가면 새로운 학교에서 친구들을 다시 사귀어야 하니까 이전의 친구들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덧붙이면서 아이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아내가 아파트로 옮길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을 때 '삼대가 덕을 쌓아야 동쪽 대문에 남향집을 짓고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로 입을 막기도 했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이 물어오면 부모님과 함께 살기에 어머님의 손때 묻은 살림살이가 많아서 아파트로는 옮길 수 없다고 핑계를 대기도 했다. 새 아파트로 이사하라는 친구에게는 직장이 걸어가면 15분 거리에 있는데 출퇴근을 생각하면 떠날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집은 70평의 대지 위에 지은 아담한 이 층 양옥이다. 남향집이라 햇살이 잘 들어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철에 창문을 열어두면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몰아내어 서재에 앉아 책을 읽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봄·여름 꽃이 피고, 가을이면 감나무·대추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도 누린다. 아침에는 새들이 날아들어 늦잠을 깨우며, 저녁에는 풀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자리에 든다. 구석구석에 놓인 부모님의 살림살이를 요긴하게 사용하면서 생활하며, 가까이에 있는 학교에 걸어서 출퇴근한다.

내 친구 K는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해 칼국수를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에 지금 잔치국수는 먹어도 칼국수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아마 나에게도 어렸을 때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밑바닥에 깊이 깔려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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