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지금 ‘속도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지만, 사람의 마음만은 오히려 닫혀가고 있다. 정보는 많아졌지만 이해는 줄어들었고 연결은 늘었지만 공감은 사라졌다. 생각이 다르면 곧 틀린 사람으로 여겨지고 다른 목소리는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이 시대의 병은 ‘다름의 부재’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다름은 생명의 질서이자 존재의 존엄이다.자연을 보라. 들판의 꽃은 모두 다르다. 하늘의 구름은 한 모양으로 머문 적이 없고,바다의 파도는 같은 결을 반복하지 않는다. 다름은 혼란이 아니라 조화의 리듬이며 창조의 질서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조롭게 빚지 않으셨다. 각자에게 다른 얼굴, 다른 성격, 다른 재능을 주셨다. 다름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는 다양성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다름이 사라진 세계는 정체된 세계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사회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편안한 듯 보이지만, 실은 죽음보다 더 조용한 독재의 상태다.
틀림의 잣대로 재단하는 사회의 피로-한국 사회는 유난히 ‘같음’을 강조해왔다. 학교에서는 정답이 아닌 생각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직장에서는 ‘조직의 색깔’이라는 이름으로 개성을 숨기게 했다. 심지어 신앙의 세계마저 다름을 허용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처럼 ‘틀림’을 두려워한 결과, 우리는 점점 더 균질한 인간으로, 안전한 생각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그러나 균질함은 안정이 아니라 퇴화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언어로 말하며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회는 결국 자기 복제의 끝에서 스스로를 소모시킨다.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는 이단을 만들었고 이단을 제거하려는 사회는 언제나 새로운 폭력을 낳는다.
태안에서 바라본 다름의 의미-태안은 바다의 도시다. 바다는 늘 다르다. 어제의 파도와 오늘의 파도는 결이 다르고, 아침의 색과 저녁의 색은 완전히 다르다.
바다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그 다름을 품기 때문이다. 민물과 짠물, 바람과 모래, 빛과 어둠 - 서로 다르지만 어우러져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 태안이 지닌 가장 큰 잠재력은 그 포용의 바다 정신에 있다. 하지만 현실 속의 지역사회는 때로 바다처럼 넓지 못하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다른 생각을 불편해한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너무도 뚜렷하다. 그러나 지역의 진정한 발전은 인구나 예산, 시설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열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다름을 포용하지 못하면 지역은 늙고 다름을 환대할 때 비로소 지역은 젊어진다. 태안이 진정한 미래도시로 거듭나려면 먼저 마음의 지평부터 확장해야 한다.
한국을 넘어, 인류로-지금 인류는 다시 문명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은 오히려 고립되고 있다. 문명은 편리해졌지만, 마음은 각자의 진영에 갇혔다. 다름은 갈등이 되었고 틀림은 혐오의 이유가 되었다.
이 시대의 진정한 혁명은 과학의 혁신이 아니라 의식의 혁명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지적 관용, 다른 문화와 종교, 다른 가치관을 이해하려는 영적 성숙이 필요하다. 그것이 인류가 다시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서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태안의 작은 변화가 한국을 바꾸고, 한국의 열린 마음이 인류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는 태안 그곳에서 새로운 문명의 불빛이 다시 타오르기를 바란다. 다름은 생명의 숨결이요, 틀림은 판단의 그림자다. 다름을 존중할 때, 인간은 진보하고 틀림을 강요할 때, 문명은 멈춘다. 바다처럼 넓은 태안의 마음이 한국을 비추고,한국의 포용이 인류를 밝히기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