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도시인 세종시 인근을 지나거나 뉴스를 접하게 되면 감회가 새롭다. 세종시 탄생의 원류(源流)로 볼 수 있는 2002년 민주당 노무현 대선 후보의 행정수도 건설 공약에서부터 2012년 세종시 출범에 이르기까지 지난(至難)했던 과정을 현장에서 취재하면서 그 기억의 편린들이 적지 않다.
2002년 당시 대선 국면에서 노 후보의 행정수도 건설 공약은 전국을 관통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수도권의 과밀화 해소와 국가의 균형 발전을 위해 추진된 이 공약은 충청권은 물론 전국적으로 최대의 이슈로 부각되면서 대선 승부를 갈라쳤다. 후일담이지만 상대 후보측에서도 아젠다 선점에서 밀렸다며 무릎을 칠 정도로 인정한 메가톤급 공약이었다.
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인 2002년 11월 유세 도중 대전 유성에서 노무현 후보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노 후보는 당시 명쾌한 논리로 행정수도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나는 1993년부터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만들어 지방화 방안을 연구해 왔다.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행정수도 이전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대전에서 30분 정도 소요되는 행정수도 건설은 충청지역을 지방 분권화의 메카가 되도록 할 것이다. 충청권에 새로운 행정수도를 건설해 정부 부처와 청와대, 국회를 이전할 것이다. 서울은 교육, 문화, 산업, 비즈니스의 중심도시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중앙 행정기관의 부속기관, 정부투자기관, 정부출연기관 등도 적극적으로 각 지방으로 분산시키겠다”
원칙과 소신을 소중히 한 노 후보는 대선 승리와 함께 이 현안을 우선 순위로 두고 국정 운영에 반영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4월 신행정수도특별조치법 시행령 공포와 함께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며 신행정수도 건설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그 해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좌초 위기를 맞게 됐다. 이 특별법이 대선 공약과 국회 통과에도 불구하고 황당한 관습헌법을 잣대로 위헌 판결이 나자 충청권 민심은 들불같이 번졌다.
충청권의 여야 정치권에서는 단식이 잇따르고 대전과 충남, 충북의 시민・사회단체, 종교・언론・학계, 출향인사까지 가세하며 신행정수도 사수를 촉구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상경 투쟁도 불사했다.
부랴부랴 정부와 정치권은 신행정수도 건설 무산에 따른 대안으로 신행정수도후속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공포했다. 지금 세종시가 행정도시로 자리잡게 된 실질적인 모태(母胎)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어진 이명박 정부 시절은 행정도시의 ‘암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우 뒤에 호랑이 만나는 격’으로 2010년 행정기관 이전을 백지화하는 내용의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 표결에 부쳐지는 곡절을 겪었지만 이 역시 충청권이 하나가 되면서 이를 극복했다.
이후 2010년 말 세종특별자치시설치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출범과 함께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이 정부 세종청사에 입주하면서 현재 행정도시인 세종시에 이르게 됐다.
역사성을 볼 때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충청권이 하나로 뭉쳐 산고(産苦) 끝에 잉태한 세종시인데도 불구하고 최근 세종시가 추진한 정원도시박람회가 무산 수순을 밟고 있다니 안타깝고 씁쓸하다.
국민의힘 소속 세종시장이 박람회 개최를 주장하며 단식농성을 벌이고 세종시의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민생예산 우선과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그 배경에 정치적 이해 관계가 작동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박람회는 충청권은 물론 국민들을 위한 행사인 만큼 여야가 서로 협력해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과거 충청권의 여야 정치권이 초당적으로 대응했고 지역민들의 피와 땀이 서린 ‘세종시 정신’을 기억한다면 작금의 극단적 대립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관련기사
- [우명균 칼럼] 국정감사 유감(有感)
- [우명균 칼럼] 희망고문된 수도권 공공기관 이전 데자뷰되나?
- [우명균 칼럼] AGAIN 충청권 2004
- [우명균 칼럼] 대선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인가?
- [우명균 칼럼] 민선 8기 충남도 중간 성적표
- [우명균 칼럼] 민생은 등골이 휜다는데...
- [우명균 칼럼] 정치 권력은 안녕하신가?
- [우명균 칼럼] 총선別曲
- [우명균 칼럼] 국회 출입 16년의 단상
- [우명균 칼럼] 원고지와 노트북
- [우명균 칼럼] 2024년 12월 3일 여의도의 밤
- [우명균 칼럼] 대통령 잔혹사
- [우명균 칼럼] 권력의 늪
- [우명균 칼럼] 소설 광장(廣場)이 소환된 이유
- [우명균 칼럼] 21대 대선 유권자 시점
- [우명균 칼럼] 새 정부에 바란다
- [우명균 칼럼] 행정수도 완성을 논하려면
- [우명균 칼럼] 양치기 소년과 공공기관 이전
- [우명균 칼럼]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그리는 예타(예비 타당성 조사)
- [우명균 칼럼] 국감 중간 성적표
- [우명균 칼럼] 내포신도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