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규모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에 대해 객관적인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한 예비타당성 조사(예타) 제도가 도입된 지 26년이 지났다. 강산이 두 번 이상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잣대로 기준점을 잡고 있으니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예타 대상 사업의 기준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총 사업비가 500억 원 이상, 국가의 재정지원 규모가 300억 원 이상인 신규 사업에 대한 예산을 편성하기 위해 예타를 실시한다.
예타는 지난 1999년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변화가 없는 상태다. 그러나 이 제도가 물가 상승 등 급격한 경제·사회 여건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가 대상 기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신속한 사업 추진에 발목을 잡고 있다.
도로와 철도, 관광, 항만, 청사 건립 등 대부분의 사업이 지가와 물가, 인건비 상승으로 예타 대상에 포함되며 사업 추진에 제약을 받고 있다. 예타 대상에 선정되기 위해 1년 이상, 조사에도 최소 1년이 걸려 예타 과정에만 2년 이상 소요되고 있다.
특히 500억 원 미만 비예타 사업의 경우도 추진 과정 중 사업비 증가로 예타 또는 타당성 재조사 대상이 되며 1-2년 가량 사업이 지연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충남을 비롯한 비수도권 지역 중에는 인구밀도가 낮은 곳은 경제성 부문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낡은 예타 기준은 세계 정세 및 인공지능(AI) 기술 등 급변하고 있는 사회에서 재정 건전성 유지라는 순기능보다 국가 경제 발전 및 혁신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비근한 사례로 충남의 경우 예타로 인해 제동이 걸린 사업들이 적지 않다. 충남의 숙원 사업인 서산공항 건설 사업이 대표적이다. 서산공항은 국토부 심의 결과 B/C(비용 대비 편익)값이 1.32로 도출됐지만 지난 2020년 예타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면서 추진이 한 차례 미뤄졌다. 2021년 11월에는 예타 대상으로 선정돼 KDI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2023년 5월 ‘부적격’ 판정을 받아 또 한번 연기됐다. 결국 도는 총 사업비를 532억 원에서 484억 원으로 조정해 서산공항에 대한 예타를 우회하는 방안을 택했다.
가로림만 국가해양생태공원 역시 2019년 예타 대상으로 선정돼 2020년 심의를 받았지만 코로나19 등의 여파로 B/C값이 예상보다 낮게 나오면서 통과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도는 사업비 2715억 원을 1236억 원까지 조정한 뒤 재조사를 받았지만 고배를 마셨다. 장항브라운필드 국가습지복원 및 아산 경찰병원 건립 등 주요 사업도 예타 통과를 위해 당초 계획보다 규모를 축소하게 된 사례로 꼽힌다.
충남도 관계자는 “예타 기준이 현실적으로 부적합하다. 현재 물가 등을 고려하면 이를 통과하기 위해 사업 규모를 축소할 수 밖에 없다”며 “그러다 보면 사업의 완성도는 자연히 떨어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쉽게 얘기하면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다’는 의미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일선 지자체에서는 예타 조사 사업의 기준을 높여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충남도는 최근 17개 시·도를 대표해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명의로 정부에 예타 기준 상향을 공식 건의했다. 기존의 예타 대상사업 기준인 총 사업비 500억 원 이상, 국가의 재정지원 규모 300억 원 이상을, 총 사업비 1000억 원, 국비 지원 500억 원 이상으로 완화하자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김태흠 충남지사 역시 국회 기재위원장과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나 예타 대상사업 기준 상향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발맞춰 제22대 국회에서도 예타 기준 상향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 발의도 이어지고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예타 기준 상향은 적기의 사업 추진으로 인해 결국 그 혜택이 국민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조속한 법안 처리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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